文學,藝術/아트칼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117] 中世 지역경제에 도움되었던 어린 聖女의 유물

바람아님 2013. 11. 28. 11:16

(출처-조선일보 2013.11.28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성녀 프와의 성유물함(聖遺物函), 나무에 은도금 및 각종 보석, 
높이 85㎝, 9세기 말부터 제작, 프랑스 콩크의 수도원 성당 소장.

성녀 프와(Sainte Foy)는 3세기경 제정 로마에서 기독교인으로 박해를 받고 처형당한 성인(聖人)으로 순교 당시에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그녀의 고향은 프랑스의 아장(Agen)이지만, 현재 그 두개골을 성유물(聖遺物)로 모시고 있는 곳은 이웃한 콩크의 수도원 성당이다. 9세기경 콩크의 수도승이 훔쳐와서는, 성인께서 간절히 원하셔서 어쩔 수 없었던 "거룩한 절도"라고 주장하니, 아장에서도 속절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성유물이란 성인의 몸이나 그 일부, 혹은 그들이 사용한 물건으로서 특히 중세 서유럽에서 열렬한 숭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성유물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멀고 고된 순례길에 올랐던 것은, 무엇보다도 최종 목적지인 성지(聖地)에 도달하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례길 곳곳에 있는 지방 성인들의 성유물을 참배하며 기적을 소원할 수 있다는 매력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엄청난 숫자의 관광객을 끌어모았던 성유물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효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프와의 성유물은 특히 눈먼 자들에게 시력을 되찾아주는 권능으로 유명했으니, 온 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콩크를 찾았겠는가. 아장에서는 땅을 칠 일이었을 게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성유물함이 조금 어색해 뵌다. 이 조상(彫像)이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9세기부터 19세기까지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부분들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박한 두상(頭像)이었던 것에 몸이 붙고, 권좌가 붙고, 은칠이 더해지고, 온갖 보석이 여기저기 붙었다. 성인의 작은 몸에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다.



<큰 이미지 - 성녀 프와의 성유물함(聖遺物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