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2.01 우석훈 경제학자)
모던 슈트 스토리
우석훈 경제학자
지난겨울 오래된 슈트들을 버렸다.
1996년 첫 출근을 하면서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산 옷들이다.
감은 정말 좋은 옷들이지만 쉰 살이 넘어가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못 입는다.
그리고 올가을, 한껏 멋을 낸 두꺼운 겨울 재킷들을 버렸다. 코트 없이 스웨터만 받쳐 입으면
겨울에 입을 수 있는 옷들인데, 이제 그렇게 입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남성들의 겨울 슈트는 요즘 터무니없이 얇게 나온다. 유행이 바뀌어서 못 입는다.
슈트를 입어야 하는 남성에게 필요한 최소 숫자는 세 벌. 여름, 겨울 그리고 봄여름. 허리에 살이 붙기 시작한 이후,
나도 매년 세 벌의 슈트를 산다. 싫지만, 자꾸 남들이 내 옷을 쳐다보는 게 싫어서 그냥 적당한 거 산다.
에든버러대학의 크리스토퍼 브루어드가 쓴 '모던 슈트 스토리'(시대의창)는 직업상 슈트를 입어야 하는 남성들이
자신이 입는 특정한 양식의 옷에 대한 문화사적 상식에 관한 책이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함께 등장한 군대의 유니폼,
최대한의 금욕을 강조한 종교적 전통, 그리고 측정과 표준이라는 공업화의 과정이 우리가 입는 슈트에 남은 흔적들을
감칠맛 나게 보여준다. 청바지와 티셔츠, 잠바, 모두 서양 옷이지만, 우리는 슈트라는 매우 특정한 옷에만 양복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갑오개혁 이후로 육군 그리고 문관들의 관복을 슈트로 정했기 때문이다.
모던 슈트 스토리 (단순한 아름다움이 재단한 남성복 400년의 역사)
원제 The Suit
저자 크리스토퍼 브루어드/ 전경훈/ 시대의창/ 2018.11.01/ 페이지 308
책은 문화사의 맥락을 따라서 검은색 상복 같은 슈트가 좀 더 화려하고 도발적인 댄디즘과 부딪히는
과정,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르마니가 전 세계를 휩쓰는 과정 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사실 특별히 패션이나 의상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맨날 입으면서도 이 옷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몰라도 된다. 그러나 알면 일상이 조금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에는, 인류의 문명을 특정 짓는 이성·평등·아름다움·진보라는 가치가 슈트와 함께
계속되는 한, 슈트 역시 지금으로부터 또다시 400년을 이어가리라는 희망이 있다."
책의 마무리 문장이다. 저자는 슈트는 앞으로도 400년은 갈 거란다. 섬유와 의류를 사양산업이라고
생각하는 정책 당국자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남성 그리고 이제는 여성들의 정장, 슈트의 스토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산업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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