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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99] 귀지

바람아님 2018. 12. 5. 08:34
조선일보 2018.12.04. 03:1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나는 의사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평생 담배는 피운 적이 없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짜고 맵고 기름진 음식보다는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고 과식하지 않는다. 20대 중반부터 거의 마시지 않던 커피는 최근 어느 의사 선생님이 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다 하셔서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10년 가까이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 수명이 줄어든다는 의학 연구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눈뜨고 있는 시간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까탈스레 귀를 후벼 댄다. 하버드 의대에 따르면 귀지는 결코 더러운 게 아니라서 제거할 필요도 없고 손가락, 면봉, 귀이개 등을 귓속으로 집어넣는 일은 위험하기까지 하다는데.


고래의 귀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 귀를 후빌 손가락이 없는 바람에 고래의 귀지는 수십 년에 걸쳐 귓구멍 속에 켜켜이 쌓인다. 때로 길이가 50㎝에 달하고 무게가 1㎏이 넘는다. 자연사 박물관 고래 표본에서 마치 나이테처럼 쌓인 고래 귀지를 꺼내 들여다보니 고래의 삶은 물론 인류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더란다.


고래잡이 어업이 횡행했던 1970년대까지는 귀지층에 스트레스 호르몬의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스트레스 호르몬 축적이 두드러졌다. 아마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일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다행히 1970년대 이후 계속 줄어들던 호르몬 수치가 1990년부터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며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고래들에게도 기후변화는 피해 갈 수 없는 스트레스 원인인가 보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 나는 우리 돌고래 연구진에게도 귀지 연구를 제안할 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돌고래는 눈 옆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지만 주로 아래턱뼈의 울림으로 소리를 감지한다. 외이(外耳)가 없으니 귀지도 쌓일 리 없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