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논설주간
서울 답방, 핫라인, 종전선언
文·金 합의했지만 대부분 불발
순환논리에 빠져 예정된 파탄
서독 동방정책 심각하게 오해
햇볕정책과 반대인 상호주의
北정권보다 주민 우선시해야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이 한 달 앞이다.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이 세 차례, 미·북 정상회담이 두 차례 열렸다. 적대적 국가 지도자들이 만난 것 자체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북한 핵무기 폐기는 방향성을 잃고 말았다. 그 결과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로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선언은 본질에서부터 이처럼 실패에 직면했다. ‘예정된 파탄’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많은 남북 협력 사업에 합의했다. 그런데 주요 합의들은 비핵화 진전 없이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획기적 남북 협력으로 비핵화를 이루자는 식의 ‘순환 논리의 함정’에 빠졌다. 한계에 봉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개성에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가 설치됐지만, 억지 춘향 격이다. 상설 면회와 화상 상봉 등 이산가족 해법의 제도화는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은 착공과는 무관한 쇼였다. 종전선언, 남북 정상 핫라인, 김 위원장 서울 방문, 3·1절 100주년 공동 기념 등은 아예 빈말이 됐다. 군사 합의도 채택됐지만, 대한민국의 안보 태세만 약화됐다. 한·미 연합훈련은 중단되고, 대북 제재 이견까지 겹쳐 동맹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국회에서 판문점 선언을 비준했더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의제인 북핵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북한은 체제 위협이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완전한 비핵화’를 할 생각이 없다.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미국은 북핵 폐기가 되돌릴 수 없게 될 때(CVID)까지는 제재를 풀 생각이 전혀 없다. 이런데도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전략적 결단을 했다고 거듭 밝혔다. 미국은 처음엔 문 대통령을 믿었지만 이젠 남·북 모두의 속임수로 생각한다. 지금 북한은 핵 동결로 제재 해제와 한·미 동맹 해체를 얻어내려 하고, 미국은 북한의 과거·현재·미래 핵 역량의 완전한 제거를 원하고 있다. 여전히 평행선이니, 결국 지난 1년 동안의 현란한 이벤트들은 서로의 속셈을 감춘 채 쌓아 올린 모래성에 불과하다.
모래성은 반드시 무너져내린다. 다시 기초부터 단단히 다져야 한다. 이를 위해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하다. 첫 번째 우상은, 미국 책임론이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 개발에 나섰고, 미국의 제재 때문에 북한 경제가 무너졌으니, 미국과 한국 등 제재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북 적대시 관계는 6·25전쟁의 산물이며,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는 자명하다. 북한 경제 붕괴는 북한 정권의 정책 실패 탓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또 하나의 위험한 우상은, 햇볕정책과 서독의 동방 정책이 같다는 것이다. 실상은 정반대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 시작된 1971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대규모 경제 지원을 했지만 ‘조건 없이 지원 없다’ 원칙에 따라 철저히 상호주의를 적용했다. 경제 지원에는 반드시 서독 방송 청취, 서독 방문 확대, 민주적 제도와 인권, 정치범의 서독행(프라이카우프)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도 일당독재 폐지와 자유 총선거를 요구해 동독 주민들이 독일 연방에 편입되는 선택을 스스로 하게 했다. 통일·평화지상주의를 경계하고 동독 주민의 자유와 삶의 질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평화와 통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구호로 오지는 않는다. 평화를 지키려면 상대를 압도할 안보 역량이 필요하고, 통일을 하려면 북한 주민들을 포용할 경제·사회 역량부터 길러야 한다. 특히 핵탄두가 하나라도 있다면 초점을 북핵 폐기와 국제공조에 맞춰야 한다. 북한 정권보다 주민 지원에 집중함으로써 북한 주민에게 같은 편이라는 우호적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야 한다. 따라서 탈북자들을 적대시하고, 북한 인권활동을 방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리고 통일은 민족 문제를 초월한 국제 문제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주변국 지지를 얻기 위해서도 한·미 동맹이 필수다. 미국 대통령이 가치 동맹에 무심하다면 먼저 다가가 설득해야 한다. 동맹이 부실해지면 북한은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로부터 멸시당한다. 통일 시기가 왔을 때 국익을 제대로 관철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허황한 이벤트와 레토릭보다 이런 일들을 묵묵히 하는 것이 모래성 아닌 튼튼한 통일의 집을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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