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와 '8초 악수'한 文, 일본의 경제보복에 이틀째 '침묵' 왜?
[중앙일보] 2019.07.02 18:04
2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일본 정부가 전날 발동한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발언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가 내보인 곤혹스러움이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맞선 일본 정부의 ‘사실상 보복 조치’였는데도 “관련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관련 질문이 계속되자 “앞으로 수입선 다변화, 국내 생산설비 확충, 국산화 등이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내놓았다.
다른 청와대 인사들도 “산업부가 대응한다”는 말 외에는 일제히 침묵했다.
실제 청와대는 일본의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 창구를 산업통상자원부로 넘겼다. 1일 오전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진행한 긴급대책회의의 결과, 성윤모 산업부 장관을 통해 “WTO(세계무역기구) 제소 등 대응조치를 취한다”고 밝힌 게 거의 전부다.
문 대통령은 다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제안으로 성사된 북·미 회담을 거론하며 “파격적 제안과 과감한 호응은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이라며 “이러한 상상력은 정치·외교에도 못지않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일본 문제에 대한 직접 언급을 피했지만, ‘상상력’ 관련 대목을 직접 써넣으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지 않았겠냐”고 했다.
청와대는 일본 정부의 강경한 대응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총선 전략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6년 임기의 참의원 중 절반을 교체하는 21일 선거를 가리킨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참의원 선거 때문으로 보고 있다”며 “일단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준비를 하면서 일본의 추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지난달 28~29일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는 “일정이 꽉 찼다”며 문 대통령과 8초간 악수를 하곤 헤어진 것도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과반인 123석 확보가 승패의 기준”이라고 밝힌 상태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대외적으로는 무대응에 가깝지만, 이를 무대책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정확히 어떻게 경제 보복을 할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즉각 반응했다가 경제 보복 수준이 올라가든 내려가든지 하는 과정으로 끌려간다면 결국 한국이 향후 협상에서 밀리게 된다”며 “이 때문에 청와대를 비롯해 총리실과 외교부에서 일절 메시지를 내지 않고 산업부를 통한 대응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도 “WTO 제소 준비를 하며 정확한 상황 파악을 보면서 대응해야 한다”는 말 외에 당장 어떤 조치가 준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내심 일본과 제재 경쟁을 했다가는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한다. 청와대 정책실의 한 인사는 “자유무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국의 경제 구조상 경제 보복으로 맞대응할 수는 없다”며 “특히 일본에 맞서 경제 조치를 취할 경우 추후 미국, 중국 등이 경제 정책과 관련해 정부에 별건으로 압박할 경우 이에 맞설 논리도 없어져 버린다”고 전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단독]"日보복카드만 100개…수차례 경고, 文정부 무반응"
전화를 건 사람은 두 부처를 두루 거친 전직 고위관료였다. 그는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두 부처에선 “알았다”고만 답했다.
이 전직 고위관료는 2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의 보복 징후를 포착했고 이를 알려줬다”고 말했다. 그는 “민간·정부 부문의 지한(知韓)파 인사가 귀띔해줬고 이를 전달했다”며 “정부가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일본 정부가 준비한 여러 보복카드 중에 이제 겨우 한 개가 나온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에 이어 단계적 보복카드가 준비돼 있다는 의미다.
통상 전문가는 예상 가능한 카드로 ▶농·수산물 수입제한(농림수산성) ▶전략물자 수출제한(방위성) ▶단기 취업비자 제한(법무성) ▶송금 제한(재무성) 등을 지목한다. 한국 정부의 대응에 따라 더 강력한 경제보복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지한파 경제학자인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이날 전화 인터뷰에서 “일본은 복수의 정부부처가 공동으로 전략을 짜왔다”며 “보복 조치를 취했을 때 한국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큰 카드를 장기간 검토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여러 차례 경제보복 가능성을 내비쳤음에도 대비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해 190여개 이상의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며 “사전에 차분하게 대응했어야 했는데 이런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는 의회에 출석해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가 현실화하면 한국에 대해 송금 중단, 비자 발급 중지 등 여러 보복 조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 다른 전직 관료는 “올 초 해외 포럼에서 일본 경제산업성 한국 담당 관료가 ‘보복 조치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해 줬고, 일본 기업 초청 투자설명회(IR)에서 민간 부문 관계자가 ‘이런 (한·일 관계) 상황에서 일본 기업의 투자를 요청하다니 정신 나간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전후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여러 방식으로 경고했지만 한국 정부는 피드백(반응)이 없었다”며 “일본 정부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거나 사태가 심각해지면 대응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야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는 “일본 스스로 시장경제·자유무역을 부인하는 과도한 조치를 한 게 맞지만, 9월 UN총회·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등 일정에 맞춰 양국 정상이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 “WTO 규칙에 맞다”=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일자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한 조치는 WTO 규칙과 정합적이지(맞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무역 (원칙)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와 국가의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수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의 이번 발언은 이번 조치가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후속 조치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 정부는 전날 디스플레이·반도체 핵심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절차 간소화 우대조치를 없앤다고 밝히면서 ‘대항 조치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동현·문희철 기자 offramp@joongang.co.kr
[사설] 日·中·美 우리 기업들 직접 겨냥, 정부는 어디에 있나
일본 정부가 반도체·스마트폰·TV 제조에 쓰이는 첨단 필수 소재 세 가지의 대한(對韓) 수출을 규제하고 나섰다. 27개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해 수출 때마다 건건이 일본 정부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신뢰 관계가 현저히 훼손됐기 때문"이라고 말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 기업 자산 압류에 대한 보복임을 분명히 했다.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일본 정부가 중국의 '사드 보복'처럼 비상식적 보복 조치를 강행하고 나섰다. 정부 차원에서 협상과 조율을 통해 해결해야 할 외교 현안이 곧바로 기업과 산업 타격으로 비화되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법원 판결을 문제 삼은 일본의 무역 보복은 자유무역 정신에 어긋나고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상 규범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 일본은 자국이 주관한 오사카 G20 정상회의가 '자유롭고 차별 없는 무역 환경'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한 지 이틀 만에 이에 역행하는 대한국 무역 차별을 감행했다. 수십년간 지속돼온 양국의 상호 호혜적 경제 관계를 뒤엎고 신뢰를 깨는 부당하고도 치졸한 조치다. 국제사회가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 간 관계에선 도덕·규범보다 힘과 실력의 논리가 우선한다. 일본이 보복 카드로 들고 나온 3개 소재는 일본산의 경쟁력이 뛰어나 세계시장의 70~90%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절대적으로 일본 제품에 의존하는 처지여서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전자 등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 경제의 급소를 타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일본도 한국산 반도체·디스플레이 의존도가 크기 때문에 타격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승인 절차를 이유로 시간을 끌고 트집을 잡으면 피해가 없을 수 없다. 안 그래도 심각한 경기 침체로 내리막인 한국 경제에 설상가상이 될 수 있다.
일본이 반도체 분야의 보복에 나설 것이란 예상은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줄곧 제기돼왔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일본의 보복도 일본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지난주 외교부 장관이 "(일본이 보복하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다"고 했지만 말뿐이다.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WTO에 제소하겠다"는 것 외에 실질적 대응 조치를 내놓지 못했다.
지난 주말 중국 베이징시가 삼성·현대차 등 120여개 한국 기업의 광고판을 뜯어내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돈을 지불하고 2025년까지 광고판 운영 계약을 맺었는데 사전 설명도, 보상 약속도 없이 군사 작전하듯 심야에 철거했다. 기업들이 베이징 당국의 불법행위로 심각한 손해를 입었지만 한국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다. 2년 전 '사드 보복' 당시 중국 정부가 롯데·현대차와 관광·한류 기업들에 막무가내 보복을 가했을 때와 마찬가지다.
방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 기업인 20여명을 초청해 "미국에 5만개 일자리를 만들어줬다"고 기업인 이름까지 불러가며 박수를 쳤다. 백악관이 미국에 투자한 기업을 중심으로 직접 초청 대상을 선정했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 이익에 도움 되지 않는 기업엔 관세 보복 등으로 손을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국 기업들에 중국과 거래하지 말라는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
강대국들이 한국 정부를 거치지 않고 우리 기업과 산업을 겨냥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압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온갖 규제와 수사로 기업의 목을 조이는 한국 정부는 자국 기업을 보호해야 할 사태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해 대일 강경 외교를 주도해 온 청와대의 입장은 "산업부에 물어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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