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0.28. 03:09
매년 겨울 이탈리아 리도(Lido)행이다. 베네치아 바로 옆 섬으로, 필자의 유럽 내 베이스캠프이기도 하다. 최근 SNS로 리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슬픈 소식 하나를 접했다. 베네치아의 단골 주점 할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가게 문을 닫았다고 한다.
리도에서 베네치아 주점까지는 배[船]로 40분을 포함해 한 시간 남짓. 해가 떨어지면 핑크빛 스프리츠(Spritz· 베니스의 전통 칵테일) 한 잔을 위해 주점으로 향했다. 간판도 없는, 필자가 아는 한 베네치아에서 가장 싼 로컬 주점이다. 50센트짜리 로컬 와인 한 잔을 시켜도 베네통 지역 특산 프로슈터(Prosciutto·이탈리아 돼지고기 햄)가 덤으로 제공됐다.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베네치아 운하 전체가 수영장이었던 때의 기억에서부터 자신이 사랑했던 말[馬]이 로컬 레이스에서 1등을 했을 때의 환호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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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여명 서서 마실 비좁은 공간이지만 베네치아 예술대학교 학생들로 터져나갔다. 저렴한 술값만이 아니라 학생들 부모의 30여년 전 연애사에 관한 '폭로'가 주점의 매력이었다. 베네치아는 좁다. 서로 전부 알고 지낸다. 걸어가는 동안 '차오(Ciao·안녕)'라는 인사를 수없이 주고받는다. 할머니는 50여년 주점을 운영해온 오리지널 베네치아노(Veneziano)다. 주점에 들렀던 전(前) 세대 대학생들의 러브스토리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 때문이기도 하지만 올겨울 베네치아에서 접하게 될 현실을 생각하면 한층 더 우울해진다. 베네치아에서 갈 만한 주점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냉동 인스턴트 음식으로 채워진 관광객용 무국적 카페가 베네치아의 일상 풍경이다. 글로벌 시대에 베네치아노 여부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도쿄까지 가서 동남아시아인이 만든 초밥을 먹을 순 없지 않나. 세계에서 가장 싼 50센트짜리 와인에 얽힌 추억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멀고도 먼' 리도에서 온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주던, 생애를 통틀어 로마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던 할머니. 40여년 전 세상을 뜬 저세상의 남편이 환한 얼굴로 맞이했으리라.
유민호 퍼시픽21 아시아담당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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