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04. 03:08
대학생 세드릭은 20대 초반 토종 파리지앵이다. 프랑스에 가면 항상 들르는 파리 외곽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그를 만났다. 청춘은 도시 공기에 민감하다. 요즘 파리에 유행하는 음식이나 레스토랑이 궁금했다. 미식가인 여자친구와 저녁에 만난다기에 두 사람이 추천하는 레스토랑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여자친구 세린은 모로코 출신 부모를 둔,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발랄한 대학생이다. 어딜 갈까 논의하던 중 알게 된 건 두 사람 모두 100% 채식주의자란 사실이다.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게 고역이라고 했던 세드릭의 말이 떠올랐다. 은밀한 로컬 레스토랑을 기대했지만 파리 최고 인기라는 채식 전용 베트남 '식당'으로 낙찰됐다.
식당은 골목 안 깊숙이 들어서 있다. 손님들로 인산인해다. 모두 젊다. 귀걸이·목걸이·코걸이 문신으로 무장한 20대 동양인 주인이 나타났다. 서로 잘 아는 듯했다. 최고 인기 메뉴라는 쌀국수를 시켰다. 베트남 커피를 포함해 12유로짜리다. 입에 대는 순간 거의 내뱉을 뻔했다. 화학조미료와 인조고기 때문이다. 동물성 단백질을 인공 배양한 대량 생산 '식용 상품'이 인조고기다. 거품 빠진 콜라와 식은 라면 수프에 적셔진 고무 맛이라고 할까? 소문으로만 듣던 인조고기지만 악몽으로 출발했다. 두 파리지앵은 '맛있게' 전부 해치웠다.
식사 중 대화의 테마는 '동물 생명권'이다. '평화·반전=동물 생명 존중=채식'이란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신념이자 신앙인 듯했다. 건강이나 체중 감량과는 무관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채식이다. 다빈치, 아인슈타인, 다이애나 모두 채식주의자였으며 파리지앵 20대 절반 정도도 '부분적'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인조고기는 단백질 보충을 위한 차선책이다. 결국, 싸고 빠르고 간단한 베트남 식당이 인기다. 21세기판 채식자용 맥도날드 매장인 셈이다.
근대 이래 프랑스는 인류 문화·문명의 큰형 역할을 해왔다. '파리=미식 천국'에서 보듯, 식(食) 영역의 경우 한층 더 특별하다. 이미 시작됐지만 인조 양고기나 인조 뱀장어 요리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간판 메뉴가 될 날도 머지않았다.
유민호 퍼시픽21 아시아담당디렉터
'人文,社會科學 > 時事·常識' 카테고리의 다른 글
[魚友야담] 나이 들었다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고? (0) | 2019.11.15 |
---|---|
[유민호의 도보여행자(Wayfarer)] [5] '교회서 우는 취한 남성' 꿈 꾸면 나폴리에선.. (0) | 2019.11.13 |
[유민호의 도보여행자(Wayfarer)] [3] 50센트 와인과 베네치아노 할머니 (0) | 2019.11.11 |
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아이 키웠다고? (0) | 2019.11.03 |
[정희진의 낯선 사이]'리얼 돌'과 인간관계 (0) | 2019.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