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北韓消息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찾아봤다, 나와 북한 남자들은 모두 '꼰대'였다

바람아님 2019. 12. 30. 08:48
조선일보 2019.12.21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화제라 해서 일부러 영화관을 찾아갔다. 북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김지영을 짓누르는 한국의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려다 고장 나는 김지영의 심리가 잘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중요 사안이 된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내 얘기가 '꼰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부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북한 사람들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보였다.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유모차에 애를 태우고 어린이집으로 간다든지 세탁기로 아이 옷을 빠는 모습, 자가용을 타고 시집으로 가는 장면 등을 보면 저렇게 편리하게 사는데 김지영이 왜 힘들어하는 걸까, 생각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편의 육아휴직, 정신과 의사와 상담 등은 북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장면이다. 반면 시집에서 식모처럼 부엌 한구석에서 일만 하다 돌아오는 모습, 시어머니가 며느리는 안중에 없고 아들 장래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북한과 똑같아 공감할 듯하다.

영화를 보면서 북한에서 나와 아내가 겪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북한에서 20여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시집살이까지 했다. 북한에서 2성 장군의 둘째 딸로 편안하게 살다가 맏아들인 나한테 시집와 시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다. 평양시 모란봉 구역의 3칸짜리 작은 집에서 동생 부부까지 합쳐 8명이 살았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배급이 중단되자 집안에서 쌀을 구해오는 사람은 외무성에 다니던 나와 무역성에 다니던 아내뿐이었다. 두 명이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렸다. 얼마 안 되는 쌀로 시아버지와 남편, 시동생 점심 도시락을 싸고 저녁에는 온 가정이 강냉이 막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퇴근할 땐 다음 날 반찬감을 구하려고 친정이나 언니 집, 장마당을 돌아다녔다. 명절이면 아침부터 정신없이 음식을 해 나르다가 저녁에야 친정에 가 쓰러졌다.

김일성은 '여성은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면서 남자들처럼 직장에 나가 똑같이 일하라고 했다. 법률상 산전휴가 60일, 산후휴가 180일인데 평균 150일 정도 휴가를 쓴다. 육아휴직제가 없어 휴가가 끝나자마자 애를 업고 출근해 직장 근처 탁아소에 맡긴다. 집사람도 시집살이하면서 애를 업고 직장에 다녀야 했다. 저녁에 지쳐 쓰러진 아내의 찬 손을 잡고 조만간 해외 공관에 데리고 나가 호강시켜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달랬다. 다음 해, 다음 해 하면서 아내를 얼렀는데 결혼 8년 만인 1996년에야 덴마크 주재 북한 공관에 파견됐다.

우리 부부는 아이 둘을 낳기로 약속했다. 북한 외교관은 자녀 두 명이 있으면 한 명은 인질로 본국에 두고 해외로 가게 돼 있다. 그래서 둘째는 해외에 나가서 낳기로 계획했다. 규정상 외교관이 해외에서 애를 낳지 못하게 돼 있어 임신해도 국가에서 병원비를 대주지 않는다. 당시 내 한 달 월급이 500달러였는데 보험이 없는 외국인은 병원 접수비부터 70달러였다. 임신 기간 병원에 정상적으로 다니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

덴마크 병원에서 아내가 출산한 날, 의사들이 아내의 진료기록이 전혀 없다며 놀라워했다.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매정하게 아내를 병원에 한 번도 데려오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병원 복도 의자에 무기력하게 앉아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아내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지만 유일하게 자부하는 것이 북한 사람치고 집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점이다. 북한에선 남편이 쓰레기를 버리면 못난 놈 취급한다. 나는 동네 시선을 개의치 않고 아침이면 출근길에 동네 쓰레기장에 쓰레기를 버렸다.

수십년 동안 북한에서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내의 고달픈 삶의 패턴이 한국에 와서도 잘 바뀌지 않는다. 아침마다 헬스장에 가면서 아내에게 같이 운동하자고 하지만 싫다고 한다. 북한에 있을 때처럼 매일 아침 나의 양복과 와이셔츠를 다리고 도시락을 준비한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이제부터라도 아내가 여생을 자기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