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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굿모닝'을 '좋은 아침'이라 통역하면 남조선식 직역이라고 당장 처벌

바람아님 2020. 1. 1. 22:35
조선일보 2019.12.28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최근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이 서울에 와서 북한에 대화를 제안했다. 이를 보도한 기사들을 찾아보니 언론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서두에 나오는 'good morning(굿 모닝)!'이었다. 일부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의역하고 일부는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직역했다. 북한에서 '좋은 아침'이라고 번역했다간 당장 처벌감이다. '남조선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대량 밀수되면서 대학생들의 아침 인사가 '좋은 아침'으로 변했다.

북한에서 통역사는 직역과 의역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어야 한다. 예컨대 북한 간부는 외국인과 담화를 시작할 때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한다. 'warm welcome to my country'라고 의역하면 되는데 일부 통역은 직역한다. 어떤 외국인들은 환영 인사인지 모르고 북한에 오는 정기 항로를 이용하기 위해 베이징에 며칠 체류하면서 뭘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한다.

나도 통역을 시작할 무렵 한 만찬에서 간부가 "별로 차린 것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라고 한 것을 "I don't have much but eat a lot"이라고 직역했다. 외국인들이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서 이렇게 많이 차린 음식을 보니 미안하다고 했다. 북한의 식량 부족 문제 얘기로 만찬을 시작하게 되니 간부는 힘이 빠졌다.

1980년대 초 김일성과 친분이 두터웠던 모잠비크의 마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가 회담장으로 들어오면서 "형님! 그새 건강하셨어요?"라며 김일성을 포옹했다. 포르투갈어 1호 통역이 차마 김일성에게 "형님"이라고 직역할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대통령의 다음 말을 놓쳐 버렸다. 답답해진 김일성이 통역을 향해 "방금 대통령이 뭐라고 했어?" 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김일성과 또 다른 대통령과의 만찬 때 있었던 일이다. 포크, 나이프와 함께 수저가 놓였다. 젓가락 이용에 자신이 없었던 외국 대통령이 통역에게 귓속말로 젓가락 대신 포크를 사용해도 되는지 물었다. 통역은 편한 것을 이용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두 사람이 소곤소곤 말하는 것을 본 김일성이 통역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물었다. 통역이 답하니 김일성이 말했다. "동무는 내 통역이오, 저 대통령 통역이오?" 원칙상 통역은 김일성에게 "수령님! 대통령이 포크를 사용해도 되는가 물어봅니다"라고 먼저 알려주었어야 했다.

백남순 외무상과 독일 의회 대표단이 통역 실수로 얼굴 붉힌 적도 있었다. 외무상이 서두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이 얼마나 위대한 수령인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대화 도중 한 의원이 외무상에게 위대한 수령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히틀러가 생각나 불편한데 그 단어를 그만 사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얘기를 들은 외무상이 "당신은 우리 인민의 위대한 수령을 모욕하는 중대범죄를 저질렀다. 우리 법에 따라 당신을 체포하겠다"며 회담장에서 나갔다. 사연인즉 통역이 '수령'을 독일어 'Führer'로 통역했는데 독일에서 'Führer'는 히틀러를 칭하는 말이다. 독일 의원이 요구한 것은 김씨 일가에 대해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Führer'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 회의에서 통역에 대한 비판 사업이 있었다. 통역은 그렇다면 '위대한 수령님'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외무성 내에서 독일어 한다는 사람들이 다 모여 머리를 쥐어짰지만 딱 맞는 말이 없었다. 결국 통역은 처벌을 면했다.

북한에서 통역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정확성보다는 자신감이다. 북한 간부는 대화가 끊김 없이 술술 흘러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도 다시 물어보지 않고 내가 이해한 것만큼만 통역했다.

남이나 북이나 통역은 선망의 대상 같지만, 통역을 직접 해본 사람으로서 그리 권장할 만한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