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北韓消息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北 배경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 내가 아는 북한 총정치국장 생각이 났다

바람아님 2020. 1. 12. 18:30

(조선일보 2020.01.11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北 배경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 내가 아는 북한 총정치국장 생각이 났다


요즘 북한을 배경으로 한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인기라 해서 한번 봤다.

서두에 아름다운 한국 재벌 상속녀와 원칙이 강하면서도 순진한 미남인 북한군 장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신데렐라'가 아니라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식 사랑 얘기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남자 주인공 리정혁이 북한군 총정치국장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북한에서 군 총정치국장은 김정은 다음가는 실세다.

막강한 힘을 가진 인물의 아들이 북한군에서 제일 열악한 곳인 DMZ를 관리하는 민경 부대에서 복무할 리는 없다.

그래도 남과 북의 최고 실세 가문 자녀의 사랑 얘기를 다룬 작품은 그간 없었던 것 같아 신선했다.


제작진이 최근 북한의 현실을 반영하려고 여러모로 애쓴 흔적도 보였다.

저녁에 정전되자 북한군 장교 아버지가 창문을 가리고 부대에서 몰래 빼내온 탱크 배터리로 전등을 켜고

아이를 공부시키는 모습, 초소에서 몰래 컴퓨터로 한국 드라마를 보는 북한군 사병, 군 보위부 간부까지도

한국 '막대기 커피(스틱형 믹스커피)'를 마시는 장면, 대한적십자 포대, 새벽이면 동네 '뜨물(음식 쓰레기)'을 모으려고

오는 아저씨, 동네 주민의 집단 율동 체조, 아침이면 동네 입구에 모여 줄을 지어 학교로 가는 아이들 모습은

마치 북한에서 촬영한 듯 생생했다. '서늘한 데 가다(감옥이나 수용소로 끌려간다)'

'생활 제대(군대 복무를 잘 못 해 제대하는 것)' '놀가지(탈북자)' '말하는 밥가마(한국산 밥솔)' 등

요즘 유행하는 '시대어(신조어)'도 나와 현실감을 더했다.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개인적으로는 윤세리의 목욕 장면이 재밌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세수하고, 온수가 안 나와 바가지에 더운물을 담아

비닐 목욕 주머니에 넣어 온도를 올린 다음 그 주머니 속에 들어가 목욕하는 장면은 영락없이 북한에 있을 때

우리 집하고 똑같았다.


한국 헬스장에서 헬스 바이크로 운동하는 장면과 북한 집에서 자전거를 돌려 생산한 전기로 TV를 보는 장면,

북한에 인터넷이 없다는 말에 놀라는 윤세리의 모습은 남과 북의 판이한 현실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것도 보였다.

북한군 병영에 '한반도의 평화'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이라는 구호가 걸려 있는데 북한은 한반도를 '조선반도',

자랑스러운 대신 '영광스러운'이라는 표현을 쓴다.

길거리 여성 교통경찰이 '교통 지도원'이라고 적힌 완장을 차고 있는데 '교통 보안원'이라고 한다.


리정혁 중대장 집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드라마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 위해 중대장 사택이라는 개인 공간을

마련했겠지만 북한에선 독신 장교에게 집을 주지 않는다. 또 중대장 집치고 너무 화려하다.

연대장 집도 그 정도로 좋지 않다. 북한 집에서는 바닥에 주단을 깔아 놓는 법은 있어도 벽에 걸어놓지는 않는다.


제일 아쉬웠던 점은 처음에는 여간첩일 수 있다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원칙을 좇던 리정혁이 윤세리의 순진함에

녹아 드라마 1회에서 벌써 그녀를 위한 해결사가 됐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순진하게 자란 윤세리는 리정혁에 대한 불신을 쉽게 거둘 수 있겠지만 북한에서 수십 년 동안

'반제 계급 교양'을 받아온 북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너무 쉽게 경계심을 푸는 것만 같았다.

내용의 논란을 떠나 하나 확실한 건 이 드라마가 북한으로 밀반입되면 매우 인기가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 히트한 영화나 드라마는 북중 국경을 통해 빠르면 6개월 늦으면 1년이면 평양까지 밀반입된다.

지금 북한군 총정치국장 김수길의 아들은 결혼했지만 친구들이 드라마를 보고 그에게 한국 재벌 상속녀와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농담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남북 젊은이의 사랑 얘기를 다룬 작품이 많이 나와 남북 관계도 리정혁과 윤세리의 사랑처럼

쉽게 풀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