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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여담>묘비명/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소박한 묘역 공개… 生前 철학 "거기 가 봤나?" 새겨

바람아님 2020. 2. 14. 08:45

<오후여담>묘비명

문화일보 2020.02.13. 11:50


한 사람의 인생을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글짓기가 없다. 산 자들이 죽은 자에게 주는 인생 성적표 같은 묘비명(墓碑銘)에는 인생철학과 삶의 흔적이 응축돼 있다. 지난 1월 작고한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묘비명에는 ‘거기 가봤나?’라고 쓰여 있다. 생전 신 회장이 직원들에게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새겨 넣은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빈손으로 세계적인 유통·식품 그룹을 만든 그의 성실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자주 했다는 ‘이봐, 해봤어?’라는 말과도 닮았다.


묘비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철학자 칸트다. 칸트는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 내 마음속에는 도덕률’이라는 자작 묘비명을 썼는데 그의 도덕 철학인 ‘실천 이성 비판’을 압축했다. 소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도 자작 묘비명에는 ‘그는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미국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오역으로 국내에 잘못 알려졌지만 ‘오래 버티고 살다 보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적혀 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라고 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시인답게 ‘불려갔음’이라고 짧게 묘비명을 남겼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비명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이라고 쓰여 있다. 평생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일생이 함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올해로 등단 51주년을 맞는 나태주(74) 시인은 고민 끝에 자신의 묘비명을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라고 정했다고 한다. 원래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자신의 시 ‘풀꽃 1’을 하려 했으나 영화에 나오는 바람에 바꿨다고 한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묘비엔 ‘자기보다 현명한 인재를 모으고자 노력했던 사나이 여기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도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이 높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런 사람들을 곁에 모아 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남겼다. CNN 창립자인 테드 터너는 묘비명으로 ‘Don’t wake up!(깨우지 마!)’이라는 말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고 밝혔다. 내 묘비명에 어떤 글이 남겨질지 생각하고 산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특히 정치인들은 당장 묘비명을 써보기 바란다.


이현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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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소박한 묘역 공개… 生前 철학 "거기 가 봤나?" 새겨

조선일보 2020.02.10 18:12

울산대 김범관 교수가 디자인… "소박한 성품 표현"

롯데그룹의 창업주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묘가 고인의 소망대로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울산대학교는 건축학과 김범관 교수가 디자인한 신격호 명예회장 묘역 모습을 10일 공개했다. 묘역은 신 명예회장의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선영에 마련됐다.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조성된 고(故)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묘. /울산대 제공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조성된 고(故)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묘. /울산대 제공
신 명예회장의 묘역은 망부석 등 석물로 화려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자그마한 봉분에 벌레 방지를 위한 측백나무가 심어졌다. 1조 원대 자산가의 무덤으로서는 검소하다는 평가다.


묘 오른쪽 가로 1.8m 크기의 와석(臥石)만이 신 회장의 묘역임을 알리는 표시다. 신 회장의 와석의 금석문에는 "여기/ 울주 청년의 꿈/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울림이 남아 있다"고 새겨져 있다.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조성된 고(故)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묘에 새긴 글귀. /울산대 제공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조성된 고(故)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묘에 새긴 글귀. /울산대 제공
생전 철학이 담긴 한 줄 "거기 가봤나?"도 덧붙어 있다. 고인은 평소 직원들에게 현장 확인의 중요성과 부지런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 문장은 영국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이지현씨가 고인의 성품이 잘 읽히도록 문장 부호를 최소화해 디자인했다고 한다.


김범관 교수는 "고인의 검소하고 권위를 따지지 않는 소박한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석을 택했고, 자연석을 세우지 않고 눕힌 수평적 배치로 조경을 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또 "죽어서 고향에 평범하게 묻힌 신 회장의 뜻을 반영했다"며 "집무실에 걸어두었던 '거화취실(去華就實·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 액자처럼 죽어서도 소박한 삶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지난달 19일 향년 9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