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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도보여행자(Wayfarer)] [17] '식(食)의 데생'이 점점 아쉬운 시대

바람아님 2020. 2. 10. 12:06

(조선일보 2020.02.10 유민호 퍼시픽21 아시아담당디렉터)


미슐랭 로고 이미지미슐랭 로고 이미지


바벨탑의 저주라고나 할까. 중국발 바이러스 한 방에 글로벌 시대의

'폐해와 모순'이 일시에 터져 나온다. 싹쓸이 쇼핑의 대명사 중국 관광객,

나아가 아시아인 전부가 왕따 대상으로 추락한다.


식(食) 분야는 바벨탑의 저주가 남다른 영역이다.

글로벌 시대의 기점은 클린턴 대통령이 등장한 1992년이다.

그해 맥도널드 베이징 지점이 선보인다. 곧이어 인스턴트, 냉동식품, 화학조미료가 전 세계로 퍼지고

'우리 모두 함께'라는 글로벌 음식도 등장한다. 무국적 탈국경, 퓨전 푸드다.

나라, 민족, 인종 구별 없이 하나가 되자는 고상한 이념을 지닌 식문화다.

좋고 싫고야 각자의 자유지만 거부할 경우 반(反)글로벌 무식꾼으로 지탄받을 수 있다.


지난해 말 룩셈부르크 레스토랑에서 체험한 일이다.

독일로 넘어가기 직전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잡힌 가까운 식당에 들렀다.

도착해서 보니 뜻밖에도 미슐랭 원 스타 레스토랑이었다. 스리 코스 점심 메뉴를 정했다.

땅콩과 채소로 채워진 두루마리형 전채(前菜)가 나왔다. 영락없이 베트남 요리 바인꾸온(Banh cuon)이다.

메인은 중국식 동파육(東坡肉), 디저트는 일본식 행인두부(杏仁豆腐)다.

언뜻 보면 프랑스풍 육류 소스와 곱게 간 시금치로 장식한 기품 있는 요리다.

그러나 기본은 칼과 포크로 즐기는 '오리엔탈 퓨전'이다.

뉴욕 아시안 델리풍 음식이 미슐랭 레스토랑까지 정복한 셈이다.


'어머니 손끝 맛, 민족의 미각'에 매달리는 음식 원리주의자로 비칠지 모르겠다. 전혀 무관하다.

우주를 묘사한 원대한 '추상화'에 앞서 손가락 '데생'부터 철저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일 뿐이다.

베트남 요리는 하노이, 동파육은 중국 항저우(杭州), 행인두부는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즐기는 것이 최고다.

신선한 재료를 쓰고 현지 요리사들의 경쟁으로 엄선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미슐랭까지 앞장서 치즈에 버무린 비빔밥을 격찬하는 시대다.

글로벌 잡탕 퓨전이 난리를 칠수록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식(食)의 데생'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