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나를 코로나에 감염시켜줘"

바람아님 2020. 4. 24. 10:23

(조선일보 2020.04.24 박은호 논설위원)


독일 의사 포르스만은 1929년 마취한 자신의 왼 팔뚝 정맥에 길고 가느다란 카테터(도관)를 밀어 넣었다.

카테터 끝이 왼쪽 어깨를 거쳐 심장에까지 닿는 과정은 X-레이 필름에 낱낱이 기록됐다.

이 실험은 심장병 진단, 치료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그는 1956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의학 발전은 종종 자신의 몸을 실험 도구로 쓴 열정적인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윤리적 인체 실험도 드물지 않다.

미 공중보건국은 가난한 흑인 매독 환자들에게 "병 고쳐준다"며 가짜 약을 준 뒤 방치했다.

환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부검까지 한 '터스키기 실험'은 1932년부터 수십 년 자행됐다.

교도소 재소자, 정신병원 입원 환자 등도 강제 인체 실험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피험자에게 충분한 사전 설명과 동의'를 규정한 세계의사협회의 '헬싱키 선언'은 1964년에야 채택됐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감염병 가운데 인류가 최초 박멸한 것은 천연두다.

220년 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인체 실험해 백신을 개발했다.

수많은 생명을 살린 공은 인정하지만 실험 대상이 남의 집 여덟 살 아이였다는 점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윤리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코로나 백신 개발에도 인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방식은 대상자를 두 부류로 나눠 백신과 가짜 약을 각각 접종한 뒤 일상생활을 하게 하면서

면역 효과를 비교 관찰하는 것이다.

대상자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까지는 백신 효과를 알지 못해 백신 개발에 수년 걸린다.

반면 '인체유발시험(human challenge trial)'은 속성이다.

대상자에게 백신을 접종한 뒤 다시 체내에 바이러스를 일부러 주입해 백신 효과를 단기간에 파악한다.

하지만 시험 대상자는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위험한 일에 어제 오후 기준 44국에서 1750명 넘는 사람이 뛰어들었다.

가정주부와 학생, 퇴역 군인, 명상가, 학자 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들이 백신 개발을 후원하는 미국 의료시민단체

사이트에 몰려와 "기쁜 마음으로 자원했다" "(백신 개발로) 모든 존재를 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현재 코로나 사망률은 세계 평균 7%, 낮은 국가도 1~2%대다.

코로나 백신 개발을 하루 앞당기면 2만명, 1주일이면 13만명, 한 달이면 50만명 이상 생명을 구한다는 통계가 있다.

남 살리자고 자기 목숨을 건 코로나 전쟁 자원자들의 이타적 결심이 놀랍기만 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4/20200424000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