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서울이라 귀성할 일이 없는 저는 명절이면 텅 비는, 한적한 서울의 도심 풍경을 참 좋아합니다.
평소에도 명절만큼 도로에 차가 없고 사람들이 없다면 서울은 정말 지금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살만한 도시일 텐테 말이죠. 인구 천만의 거대한 메가시티인 서울은 엄청난 크기만큼 곳곳에 보석 같은 곳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는 요즘 서울시정 전반을 취재하는 서울시 출입 기자로 일하면서, 서울의 이곳 저곳을 이전보다 훨씬 꼼꼼하게 들여다보게 됐고, 멋진 곳들이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도 제법 많이 알게 됐습니다.
1. 60-70년대 골목길 정취를 흠뻑 느끼고 싶을 때-종로 운니동. 익선동 골목길
운니동과 익선동은 창덕궁 정문 앞에서 등을 지고 종로 쪽을 바라보면 펼쳐져 있는 지역입니다.
북촌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지역인데, 주말이면 인파로 북적이는 북촌과 달리 이곳은 언제 가도 참 고즈넉합니다. 쭉 뻗은 큰 길에서 조그만 들어가면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한옥들과 가게들이 있는데요.
무엇보다 거리 사이사이에 아주 발랄한 갤러리와 옷집들이 아기자기 숨어 있어 의외의 매력이 가득한 곳입니다. 한때 북촌과 서촌에 열광했던 디자이너나 예술가들이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지역인데요. 느낌 좋은 디자이너나 예술가들이 개인 작업실 겸 매장을 하나둘씩 열고 있어서 6-70년대 정취의 골목길에 2014년 가장 최신의 트렌드가 공존하는 아주 특이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죠.
특히 떠들썩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실망한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곳을 안내하면, "화장하지 않은 서울의 진짜 모습 같다며"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특히 종로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아는 사람만 안다는 돼지고기 전문 고기 집들이 모여 있는 종로의 숨겨진 맛집 골목이기도 합니다.
2. 동대문·인터넷보다 더 싸게 쇼핑하고 싶을 때-강남 '고투몰'
고투몰은 강남고속버스터미털 지하상가가 새롭게 리뉴얼해 재개장하면서 공식 상가이름으로 붙여진 명칭인데, 사실 쇼핑 고수들 사이에선 여전히 '터미널 지하'로 통하는 곳입니다.
리뉴얼을 하기 전에도 쇼핑을 좀 한다 하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성지(聖地)로 통하던 곳인데 깨끗하게 새 단장을 한 뒤엔 더욱 강력하고 매력적인 쇼핑장소로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일단 이곳은 의류가 엄청나게 쌉니다. 요즘 10-20대는 물론 30-40대가 가장 열광하는 스타일의 옷을 알고 싶다면 이곳에 가서 몇 군데만 둘러보면 됩니다.
명동과 신촌, 이대앞, 홍대 보다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이 평균 20% 이상 싼 것은 물론 티셔츠나 레깅스같은 가장 대중적인 아이템들은 동대문보다 싼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도매가격으로 판매하는 청평화시장 등에서 대량 구입해 마진을 최소화해서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동대문이라도 개별 소비자들이 가면 소매 가격을 받기 때문에 도매가로 물건을 떼어와서 마진을 적게 받고 파는 고투몰이 더 쌀 수 있는 거죠.
특히 이곳은 옷 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관련 제품도 무척 유명합니다. 의류가 주로 값싸면서도 유행을 반영한 대중적인 아이템들을 주로 취급한다면 , 인테리어 관련 제품은 저가부터 고가까지 제품의 수준도 매우 다양하고 유행도 발 빠르게 반영해 인테리어업계에 종사하는 이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곳의 장점은 몰의 양쪽 끝에 있는 먹거리 식당들입니다. 늘 긴 줄이 서 있는 저렴하지만 맛있는 초밥집을 비롯해 싸고 맛있는 식당들이 쇼핑에 출출해진 배를 기분 좋게 메워줍니다.
3.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안 부럽다'...조용히 사색하고 싶을 때-양천 서서울 호수공원
이 곳을 처음 찾았을 때 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워낙 공원이나 정원을 좋아하는 저는 출장이나 휴가차 외국의 도시를 가게 되면 반드시 시간을 내서 그 도시가 가장 자랑하는 공원에 꼭 가보곤 했는데요. 정원이라면 굉장한 자부심을 과시하는 유럽은 물론 깨끗하고 쾌적함을 자랑하는 미국 등 제가 봤던 그 어떤 세계의 공원과 견주어도 손색없이 멋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특히 공원 조성에 열정적이었던 오세훈 전 시장에게 시장 재임 시절, "서울에서 가장 가슴이 벅차게 뿌듯한 공간이 어디인가요?"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오세훈 전 시장 역시 서서울 호수공원을 첫손에 꼽아서 저와 한참 동안 이곳의 매력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2009년 10월에 문을 연 서서울 호수공원은 물과 재생을 주제로 한 친환경공원입니다. 이곳은 원래 1959년에 인천 지역 정수장으로 건설된 곳인데 1979년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신월정수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하루 평균 12만 톤의 수돗물을 공급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서울시 정수장 정비계획에 따라서 가동이 중단된 이후, 공원으로 탈바꿈한 겁니다.
오랜 기간 '물'과 관련된 공간이었던 만큼 그 공간의 기억을 그대로 살려 친환경 생태 공원으로 건설됐는데 지나치게 인공적이지 않으면서 묘하게 서정적인 정취가 느껴져서 더욱 매력적인 공원입니다.
특히 정수장 시절의 건물 잔해들을 그대로 살려 디자인한 공간들은 그것 자체가 훌륭한 설치 작품처럼 느껴질 만큼 예술적입니다.
이곳은 언제 가도 아름답지만, 전 개인적으로 해질 무렵에 가보길 권합니다.
물과 나무들과 노을과 하늘이 어우러지는 풍광이 서정적인 색채와 빛나는 에너지가 가득한 17세기 루벤스나 반 다이크 같은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4. 조선왕조의 품격을 느끼고 싶을 때-종로 종묘와 순라길
이곳은 마음이 심란할 때, 생각을 정리할 때 제가 찾는 곳입니다.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인 종묘는 너무나 유명한 사적이지만, 시민들이 정작 안 들어가 본 사적 중 첫 손에 꼽히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고전'으로 불리는 문학 작품들을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실제론 거의 읽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죠. 이미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는 일단 들어가 보면 그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적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는 곳입니다. 한 번도 종묘에 들어가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속는 셈 치고 일단 종묘에 한번 들어가 보신다면, 저의 이런 극찬에 분명히 공감하실 겁니다.
종묘가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종묘의 돌담길이 크게 한몫합니다. 종묘 양편의 돌담길은 순라길이라 불리는데, 조선 시대 궁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돌던 길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아직까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언제 가도 한적한 이곳은 돌담길의 대명사인 덕수궁 돌담길보다 훨씬 고즈넉하고, 조선 시대 정취도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종묘 안쪽의 나무들이 돌담 쪽으로 크게 우거져 있어서 한낮에 가도 종묘의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공간인데, 특히 촉촉하게 비가 내릴 때 가면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면서 운치를 더해주는 곳입니다.
5. 근대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싶을 때-서대문 딜쿠샤 저택
'딜쿠샤'란 단어 참 생소하시죠. 힌디어로 이상향, '희망의 궁전'이란 뜻이랍니다.
사직터널이 지나가는 언덕 위에는 이렇게 멋진 이름을 가진 저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쇠락할 대로 쇠락해서 멋진 이름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이 고색창연한 집은 건축에 전혀 조예가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뭔가 대단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 만큼 범상치 않은 건물입니다.
현재는 영세민들이 살고 있는 딜쿠샤 저택은 UPI 특파원으로 한국의 3.1 운동을 전 세계에 최초로 타전한 미국인 기자 앨버트 테일러 가족의 집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소중한 기사들 대부분이 이 집의 서재에서 작성된 겁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은 눈엣가시였던 테일러 부부를 강제추방했고, 한국을 너무나 사랑해 공들여 이렇게 아름다운 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는 끝내 딜쿠샤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48년 미국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미국에서 숨을 거둔 테일러 기자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한국땅에 유해로 돌아왔지만, 그가 일본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한 역사적 장소인 딜쿠샤 저택은 방치된 채 붕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쇠락할 대로 쇠락한 딜쿠샤 저택을 가보시길 권하는 건, 실제로 가보면 우리가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런 조국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난과 용기 덕분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줍니다.
"근대사의 너무나 중요한 역사적 장소조차 방치하는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란 질문을 던지는 딜쿠샤 저택....더 쇠락하기전 전 꼭 한번 가보시길 권합니다.<최효안 기자hyo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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