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시리즈 ② 어르신들의 필수품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주상돈 기자, 김보경 기자] "아들내미 전화번호는 몰라도 12번은 절대 안 까먹제."
공원 안 팔각정은 어르신들의 '핫 플레이스'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김 할아버지(78)가 MP3에 12번을 또박또박 입력하자 애절한 목소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흘러나옵니다. 바르게살기운동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쓰고 감청색 점퍼를 걸친 할아버지가 노래를 흥얼거리다 묻습니다. "이 노래 모르제? 김정호라는 친구가 불렀는디 이 친구도 간 지 꽤 됐을걸." 그러고 보니 '하얀 나비' '이름모를 소녀'를 불렀던 그 김정호(1952~1985)가 이 노래도 리메이크했군요. 얼마나 자주 버튼을 눌렀으면 버튼 주변이 손때로 새카맣습니다. "집에서는 테레비(TV) 보기도 눈치 보이고 이거 있으면 안 심심해서 좋아. 자식새끼들 목소리보다 더 자주 듣는당께."
이 MP3는 스마트폰 크기의 몸체에 엄지손가락만 한 화면이 있고, 1부터 0까지 버튼이 큼지막하게 달려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MP3를 사면 수첩을 나눠 준다는 것입니다. 손바닥만 한 책자를 펼치면 경음악, 팝송, 가요, 민요 등 2200곡의 노래가 번호와 함께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이곳에서 팔리는 MP3 대부분은 중국산인데 가격은 2만~4만원입니다. 또 이 MP3는 외장 스피커라는 '첨단 기능'(?)을 갖추고 있어 또래 어르신들이 모여서 함께 음악감상을 하는 데 요긴합니다. 이곳을 찾는 어르신들을 위해 맞춤 제작된 '파고다 전용 MP3'인 겁니다.
젊은이들이 '수지앓이'를 한다면 이곳 할아버지들은 '김용임'에 푹 빠져 있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은 "김용임 좋지~. 목소리가 어찌나 가슴을 후벼 파는지"라고 말합니다. 서울 성북동에 사는 이(李)씨 할아버지(72)의 애창곡도 김용임의 '부초같은 인생'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웃으면서 살아가보자~'라고 이 노래의 한 대목을 중얼거립니다. 이 할아버지는 경남 마산에서 3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탄탄대로 같던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이 빚만 잔뜩 지고 망하면서부터였습니다. 빚쟁이에 시달리다 못해 밤기차에 몸을 싣고 성북동으로 도둑 이사를 와야 했다는군요. 사업 실패로 아내와도 갈라서고 지금은 두 아들과도 척지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큰아들은 내로라하는 한 병원의 소화기내과 과장으로 있어 자식자랑을 할 법도 한데 한창 뒷바라지할 나이에 아버지 몫을 제대로 못한 게 미안해 왕래가 없어도 그러려니 한다네요.
"이놈의 시키는 전화할 때마다 외국에 나가 있대. 내한테 전화 먼저 한 적 있는 줄 아나? 자식이고 며느리고 다 소용없는기라." 소용없다고 말하면서도 이야기 중간중간 휴대전화가 울리면 화면에 뜬 번호를 가만 들여다보는 할아버지의 눈에서 일말의 기대가 읽힙니다. 한 번은 먼저 전화 오지 않을까 하는. "그래도 먼저 전화 오면 반가울 것 같지요?"라고 넌지시 묻자 "반갑기는…. 하긴 내도 부도내가(부도를 내고) 도망쳐뿟으니(도망쳤으니) 할 말은 없제"라고 말끝을 흐립니다.
지난 6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할아버지(75)도 인천서 파고다까지 마실 나올 때 뇌졸중 약 2봉지, 감기약 1봉지와 함께 파란색 MP3를 꼭 챙겨 나옵니다. 김 할아버지에게 MP3는 '추억 재생용'입니다. 50여년 전 서울 덕수상고에 다닐 땐 음악반장을 맡을 만큼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전신)에 다닐 땐 부산문화방송이 주최한 노래자랑에 나가 일등도 먹었습니다. 당시 25개 팀이 경합을 벌였는데 가곡 '동심초'로 경쟁자들을 꺾었다는군요. 그때 노래자랑서 받은 상금을 함께 '탕진'한 친구 녀석 네 명은 깜깜무소식입니다. 이미 저승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넘어갑니다.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동심초의 노래가사처럼 김 할아버지는 "먹고사는 데 바빠서 고향도 친구도 잊고 살았어"라고 쓸쓸히 말합니다.
지난 현충일에 쓰러져 두 달 가까이 병고를 치르고도 김 할아버지는 퇴원 20일 만에 다시 이곳에 나왔습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세 자녀와 큰 갈등 없이 지내온 김 할아버지도 외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람은 진작 갔지. 큰아들은 오십이 넘고 큰딸은 마흔인데 지 자식들 건사하려면 오죽 바쁘겠어. 서른다섯인 막내아들하고 같이 사는데 뭔 얘기를 하겠어. 뭐 하루에 서너 마디 하나…." 말을 흐린 할아버지가 이내 MP3 버튼을 누릅니다.
이렇게 '파고다 MP3'는 단순히 노래만 나오는 기계가 아닙니다. 삼삼오오 모인 할아버지들에게 추억을 재생하며 흥을 돋우는가 하면 아린 기억을 달래주는 자양강장제가 되기도 하고, 자식 손주를 대신해 말동무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MP3란 놈이 이곳 '늙은 오빠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요물인 게 분명합니다.
삼촌들에게 '수지'가 있다면 할아버지들에게는 '용임이'와 '잔디'가 있습니다. 목동에 사는 최모(78) 할아버지는 "김용임, 금잔디, 배호, 오승근이가 유명하지. 김용임은 얼마 전에 독일도 다녀왔다던데"라며 김용임의 근황까지 훤히 꿰고 있습니다. MP3를 파는 주인마저 '할아버지, 용임이가 나와요. 용임이'라고 선전할 만큼 노인들 사이에서 김용임은 그야말로 '인기짱'입니다.
김용임이 애절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들 가슴을 후벼 판다면 금잔디는 신세대 트로트가수로 꼽힙니다. 금잔디의 '오라버니'를 듣고 있으면 할아버지들은 이팔청춘인 양 연애하고 싶어진다고 말합니다. '오라버니 어깨에 기대어 볼래요.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지금 이대로 죽어도 여한 없어요'라는 대목에 이르면 당장이라도 할머니 손 붙잡고 마실 나가고 싶어진다고 고백합니다.
금잔디의 목소리가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간지럽힌다면 만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배호의 노래는 따라 부를수록 무언가 뜨거운 것이 훅 하고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답니다.
노년을 경험하지 못하고 노래만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 떠난 배호가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라고 속삭이면 할아버지들은 앞서 간 아내, 갈라선 자식, 앞세운 친구들이 생각난답니다. 그래서 노래를 크게 따라부르진 못하고 웅얼이하듯 '누가 울어'를 주워 삼킨다고 했습니다.
68년 '비둘기집'으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놔 70~80년대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오승근도 어르신들 사이에서 아이유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인데'라는 구절을 들을 때마다 '그래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가슴팍에 힘이 들어간답니다.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주상돈 기자, 김보경 기자] "아들내미 전화번호는 몰라도 12번은 절대 안 까먹제."
공원 안 팔각정은 어르신들의 '핫 플레이스'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김 할아버지(78)가 MP3에 12번을 또박또박 입력하자 애절한 목소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흘러나옵니다. 바르게살기운동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쓰고 감청색 점퍼를 걸친 할아버지가 노래를 흥얼거리다 묻습니다. "이 노래 모르제? 김정호라는 친구가 불렀는디 이 친구도 간 지 꽤 됐을걸." 그러고 보니 '하얀 나비' '이름모를 소녀'를 불렀던 그 김정호(1952~1985)가 이 노래도 리메이크했군요. 얼마나 자주 버튼을 눌렀으면 버튼 주변이 손때로 새카맣습니다. "집에서는 테레비(TV) 보기도 눈치 보이고 이거 있으면 안 심심해서 좋아. 자식새끼들 목소리보다 더 자주 듣는당께."
파고다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뒷짐 지고 걷는 할아버지의 손, 허리춤, 셔츠 앞주머니에 쏙 들어가 있는 MP3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명 '효도 MP3'라 불리는 이 MP3는 노인들 사이에서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인 셈이죠. 공원 서문에서 무료급식소가 있는 북문 사이에는 '효도 MP3'를 파는 좌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매장'을 운영하는 아저씨는 "탑골공원에 오는 어르신 넷 중 한 명은 MP3를 가지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이 MP3는 스마트폰 크기의 몸체에 엄지손가락만 한 화면이 있고, 1부터 0까지 버튼이 큼지막하게 달려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MP3를 사면 수첩을 나눠 준다는 것입니다. 손바닥만 한 책자를 펼치면 경음악, 팝송, 가요, 민요 등 2200곡의 노래가 번호와 함께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이곳에서 팔리는 MP3 대부분은 중국산인데 가격은 2만~4만원입니다. 또 이 MP3는 외장 스피커라는 '첨단 기능'(?)을 갖추고 있어 또래 어르신들이 모여서 함께 음악감상을 하는 데 요긴합니다. 이곳을 찾는 어르신들을 위해 맞춤 제작된 '파고다 전용 MP3'인 겁니다.
MP3 기능에 동영상 기능까지 갖춘 제품은 8만원으로 좀 더 비쌉니다. 김용임, 금잔디 등 성인가요 가수들의 동영상이 주로 들어가 있다는군요. 그런데 주인아저씨 말로는 할아버지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서는 '여기 야동은 있냐'고 묻는답니다. '야동'을 말할 때 할아버지들의 눈빛은 20대 젊은이의 눈빛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는군요. 본인은 양심상 야동은 취급하지 않지만 서울 동묘역 근처 벼룩시장에 가면 야동을 넣어 파는 MP3가 많은데 이를 찾는 '야동 순재' 할아버지들이 꽤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수지앓이'를 한다면 이곳 할아버지들은 '김용임'에 푹 빠져 있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은 "김용임 좋지~. 목소리가 어찌나 가슴을 후벼 파는지"라고 말합니다. 서울 성북동에 사는 이(李)씨 할아버지(72)의 애창곡도 김용임의 '부초같은 인생'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웃으면서 살아가보자~'라고 이 노래의 한 대목을 중얼거립니다. 이 할아버지는 경남 마산에서 3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탄탄대로 같던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이 빚만 잔뜩 지고 망하면서부터였습니다. 빚쟁이에 시달리다 못해 밤기차에 몸을 싣고 성북동으로 도둑 이사를 와야 했다는군요. 사업 실패로 아내와도 갈라서고 지금은 두 아들과도 척지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큰아들은 내로라하는 한 병원의 소화기내과 과장으로 있어 자식자랑을 할 법도 한데 한창 뒷바라지할 나이에 아버지 몫을 제대로 못한 게 미안해 왕래가 없어도 그러려니 한다네요.
"이놈의 시키는 전화할 때마다 외국에 나가 있대. 내한테 전화 먼저 한 적 있는 줄 아나? 자식이고 며느리고 다 소용없는기라." 소용없다고 말하면서도 이야기 중간중간 휴대전화가 울리면 화면에 뜬 번호를 가만 들여다보는 할아버지의 눈에서 일말의 기대가 읽힙니다. 한 번은 먼저 전화 오지 않을까 하는. "그래도 먼저 전화 오면 반가울 것 같지요?"라고 넌지시 묻자 "반갑기는…. 하긴 내도 부도내가(부도를 내고) 도망쳐뿟으니(도망쳤으니) 할 말은 없제"라고 말끝을 흐립니다.
지난 6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할아버지(75)도 인천서 파고다까지 마실 나올 때 뇌졸중 약 2봉지, 감기약 1봉지와 함께 파란색 MP3를 꼭 챙겨 나옵니다. 김 할아버지에게 MP3는 '추억 재생용'입니다. 50여년 전 서울 덕수상고에 다닐 땐 음악반장을 맡을 만큼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전신)에 다닐 땐 부산문화방송이 주최한 노래자랑에 나가 일등도 먹었습니다. 당시 25개 팀이 경합을 벌였는데 가곡 '동심초'로 경쟁자들을 꺾었다는군요. 그때 노래자랑서 받은 상금을 함께 '탕진'한 친구 녀석 네 명은 깜깜무소식입니다. 이미 저승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넘어갑니다.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동심초의 노래가사처럼 김 할아버지는 "먹고사는 데 바빠서 고향도 친구도 잊고 살았어"라고 쓸쓸히 말합니다.
지난 현충일에 쓰러져 두 달 가까이 병고를 치르고도 김 할아버지는 퇴원 20일 만에 다시 이곳에 나왔습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세 자녀와 큰 갈등 없이 지내온 김 할아버지도 외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람은 진작 갔지. 큰아들은 오십이 넘고 큰딸은 마흔인데 지 자식들 건사하려면 오죽 바쁘겠어. 서른다섯인 막내아들하고 같이 사는데 뭔 얘기를 하겠어. 뭐 하루에 서너 마디 하나…." 말을 흐린 할아버지가 이내 MP3 버튼을 누릅니다.
이렇게 '파고다 MP3'는 단순히 노래만 나오는 기계가 아닙니다. 삼삼오오 모인 할아버지들에게 추억을 재생하며 흥을 돋우는가 하면 아린 기억을 달래주는 자양강장제가 되기도 하고, 자식 손주를 대신해 말동무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MP3란 놈이 이곳 '늙은 오빠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요물인 게 분명합니다.
◆금잔디·배호·오승근 탑골공원 아이돌스타
삼촌들에게 '수지'가 있다면 할아버지들에게는 '용임이'와 '잔디'가 있습니다. 목동에 사는 최모(78) 할아버지는 "김용임, 금잔디, 배호, 오승근이가 유명하지. 김용임은 얼마 전에 독일도 다녀왔다던데"라며 김용임의 근황까지 훤히 꿰고 있습니다. MP3를 파는 주인마저 '할아버지, 용임이가 나와요. 용임이'라고 선전할 만큼 노인들 사이에서 김용임은 그야말로 '인기짱'입니다.
김용임이 애절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들 가슴을 후벼 판다면 금잔디는 신세대 트로트가수로 꼽힙니다. 금잔디의 '오라버니'를 듣고 있으면 할아버지들은 이팔청춘인 양 연애하고 싶어진다고 말합니다. '오라버니 어깨에 기대어 볼래요.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지금 이대로 죽어도 여한 없어요'라는 대목에 이르면 당장이라도 할머니 손 붙잡고 마실 나가고 싶어진다고 고백합니다.
금잔디의 목소리가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간지럽힌다면 만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배호의 노래는 따라 부를수록 무언가 뜨거운 것이 훅 하고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답니다.
노년을 경험하지 못하고 노래만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 떠난 배호가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라고 속삭이면 할아버지들은 앞서 간 아내, 갈라선 자식, 앞세운 친구들이 생각난답니다. 그래서 노래를 크게 따라부르진 못하고 웅얼이하듯 '누가 울어'를 주워 삼킨다고 했습니다.
68년 '비둘기집'으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놔 70~80년대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오승근도 어르신들 사이에서 아이유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인데'라는 구절을 들을 때마다 '그래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가슴팍에 힘이 들어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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