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4. 6. 22. 00:40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서양식으로 동양 정신 그려낸
‘문자추상’의 거장 화가 남관
“이제 와서 외국에 나오면 무슨 수가 생기겠니. 예술이 또한 무어 대단한 거겠니. 나도 모를 일이다. 그저 가슴에 무슨 원한 같은 게 맺혀 있을 뿐이다. 뭐니 뭐니 해도, 끼니를 거르고 죽을 먹더라도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화가 김환기가 뉴욕에 있을 때, 고국의 딸에게 보낸 편지다. 그가 한국 미술로 승부를 걸어 보겠다고 파리와 뉴욕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는 노모와 어린 세 딸이 있었다. 자책의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외국에서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이 세대 예술가들. 우리 역사와 문화가 무시받고 짓밟힌 시대를 경험한 세대. 이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고 싶다는 열망은, 나 그리고 나라의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짊어진 소명을 안고, 전쟁 후 수많은 화가가 파리로 몰려갔다. 성공을 거둔 이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 김환기조차도. 파리를 떠나며 김환기가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당부한 화가가 있었다. 남관(1911~1990)이다. 파리에서 14년을 체류하며, 결국 성공해 돌아온 화가. 그러나 실로 파란만장했던 화가.
남관은 1911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청송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고보(현 경북고)로 진학하려 했으나 1920년대 학생 동맹휴학 사건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중학에 입학했다. 학교 성적은 좋았으나 사람들과 어울려 하는 대부분의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반 고흐의 화집을 보고 감명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광기에 가까운 고흐의 예술적 도취는 남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녔고, 일본인 교수 화실에서 사숙하며 인정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남관이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환기, 환기”였다. 남관을 가장 잘 이해했던 유일한 친구. 김환기를 찾아 남관도 그렇게 떠났다.
https://v.daum.net/v/20240622004026038
파리에서 성공한, 지독히 외로웠던 집념의 한국인
'文學,藝術 > 아트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37] 젊은 순교자 (2) | 2024.06.25 |
---|---|
동생과 바람핀 남편과 또…‘강박적 사랑’이 만든 400억대 작품 [0.1초 그 사이] (2) | 2024.06.23 |
벌거벗은 女, ‘야수 득실’ 정글 한복판에 어쩌다…‘영감님’의 남다른 구상[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2) | 2024.06.15 |
광장 공포증을 앓는 뭉크가 본 세상 [으른들의 미술사] (2) | 2024.06.13 |
“21살 연하男과 결혼” 인기 모델女의 ‘깜놀’ 스캔들…이유있는 파격행보[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수잔 발라동 편] (2) | 2024.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