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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91] 88만원 세대의 투표권

바람아님 2014. 6. 29. 21:26

(출처-조선일보 2012.12.10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민주주의의 역사는 다시 말하면 투표권 취득의 역사이다. 
지금은 민주국가를 대표하지만 미국에서 흑인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1870년이었고, 
여성은 그보다도 훨씬 늦은 1920년이 되어서야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투표권과 관련하여 인종과 성별 못지않게 민감한 게 연령이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만 21세가 되어야만 투표할 수 있었던 것이 1971년 개정 법안이 통과되며 
만 18세로 낮아졌다. 투표권의 나이가 이처럼 3년이나 낮아지는 데에는 베트남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젊은 나이에 전쟁에 끌려가 목숨을 잃을 수는 있지만 정작 그런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는
갖지 못하는 모순을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만 19세가 되어야 투표권을 얻는다. 
미국보다 1년이 늦은데 우리가 미국 사람들보다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냐는 볼멘소리가 드높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르는 서울시 교육감 재선거에 출마할 진보 진영의 단일 후보를 추대하는 과정에서는
만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시민선거인단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흑인과 여성, 그리고 젊은이들이 얼마나 어렵게 투표권을 획득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인식도 없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많은 젊은이는 투표일을 그저 뜻밖에 횡재한 노는 날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적이 실망스럽다.

"투표(ballot)냐 총알(bullet)이냐." 이것은 1964년 미국의 시민운동가 맬컴 엑스(Malcolm X)의 대중연설 제목이었다. 
당시 미국 의회에 상정되어 있던 시민권 법안의 통과를 위해 흑인들로 하여금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투표는 마치 총알과 같다. 우리가 투표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칫 총을 사용해야 될지도 모른다. 투표가 아니면 총알이다."

세계인권선언을 이끌어낸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전설 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라는 책이 최근 번역되어 나왔다. 
천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젊음의 무관심은 그 자체로 죄악이라며 "분노했다면 참여하라! 참여가 세상을 바꾸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라고 부르짖는다. 
'88만원 세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굴레를 벗기 위한 아주 가벼운 첫걸음조차 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