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12.03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행동생태학이나 진화생물학을 전공하고 싶다며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미리 하고
오면 되느냐 묻는 학생들에게 나는 영어와 통계학을 권한다. 영어는 이제 명실공히 만국공용어가 되었다.
학술 언어로는 더더욱 그렇다. 일상 언어는 지역에 따라 스페인어나 중국어가 통용되기도 하지만
학술회의나 학술 논문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 일색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구라도 영어로 발표하지 않으면 빛을 보기 어렵다.
과학 연구에서 통계학만큼 중요한 도구도 별로 없다.
과학 연구에서 통계학만큼 중요한 도구도 별로 없다.
나는 과학을 종종 입증과학(proof science)과 통계과학(statistical science)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물리학과 화학의 일부 분야에서는 단 한 번의 실험으로도 이론을 입증하거나 물질의 존재를 확정할 수 있다.
힉스 입자의 유무에 관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연구가 입증 과학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런 몇몇 과학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과학은 무수히 많은 관찰과 실험의 결과로 증거들이 축적되어
패러다임이 확립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생물학과 지구과학은 대체로 통계과학에 속한다. 그런데 통계과학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현상 세계의 모든 구석구석을 죄다 관찰할 수 없어 모집단과 표본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태어난 학문이 바로 통계학이다.
통계학적 안목을 갖고 설계한 실험은 그렇지 않은 실험과 그야말로 천양지차를 만들어낸다.
여론조사 결과에 울고 웃는 정치계만큼 통계학의 위력을 맹신하는 분야가 또 있으랴 싶다.
여론조사 결과에 울고 웃는 정치계만큼 통계학의 위력을 맹신하는 분야가 또 있으랴 싶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여론조사는 심각한 신뢰성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조사기관에 따라 여론 추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19세기 영국의 총리 디즈레일리는 계산의 무지가 거짓말 통계를 낳을 수 있음을
19세기 영국의 총리 디즈레일리는 계산의 무지가 거짓말 통계를 낳을 수 있음을
"거짓말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가 그들이다"라는 말로 꼬집었다.
모집단과 최대한 닮은 표본을 추출하려는 노력이 통계학의 기본이건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표본과 질문을 얻어내려
아등바등한다. 여론(輿論)을 파악하려는 것인지 여론(餘論)을 부풀리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른바 '데이터 마사지(data massage)'를 이처럼 대놓고 할 바에야 차라리 연론(演論)이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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