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이정재의 시시각각] 대권주자도 청문회 하자

바람아님 2015. 2. 12. 10:50

[중앙일보] 입력 2015.02.12

 

이정재/논설위원

 

“40년 준비했으니 청문회쯤이야.” 가볍게 시작한 그다. 대통령의 지명 당일 “따 놓은 당상”이라며 여야 지도자들이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하지만 그건 청문회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본 오판이었다. 청문회의 문을 연 순간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에겐 지옥도가 펼쳐졌다. 청문회는 40년 분칠했던 그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는 연신 백배사죄, 대오각성을 말하며 굴신(屈身)해야 했다.

 악전고투 중인 이완구 후보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나는 그가 총리가 되고 말고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은 되레 당대의 의회 권력을 벌벌 떨게 만든 청문회의 경이적 ‘후보자 실체 규명 능력’-이완구의 40년 준비를 단 며칠 만에 무력화한-에 있다.

 이 좋은 걸 왜 대선 주자들에겐 쓰지 않는가. 선출직이란 이름으로 부적격·무능·부패를 다 짊어지고도 큰소리치는 국회의원들에겐 왜 적용하지 않나. 그 바람에 왜 우리의 투표권은 늘 최선이 아닌 차악(次惡)을 뽑는 데 쓰여야 하나.

 이참에 청문회의 용도를 업그레이드하자. 대권주자들도 청문회를 거치게 하자. 청문회에 안 서면 아예 출마를 못하도록 하자. 대상은 여야 후보와 여론 지지율 5% 이상 후보 정도면 될 것이다. 형식은 총리·장관 청문회처럼 하되, 날짜는 한 사람당 4~5일로 늘리자. 능력·도덕성, 서로 상대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얼마나 치열하게 파헤치겠나. 국민 앞에 후보자의 실체가 이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TV토론 방식은 미진하다. 인상 좋고 토론 잘하면 유리하다. 상대를 잘 받아치기만 하면 된다. 정책은 참모들이 써준 걸 읽고, 웬만한 공격은 ‘흑색 선전’이라고 되돌려 치면 그만이다. 그러니 위장 전입을 10여 차례 한 후보도 당당히 당선되는 것 아닌가.

 청문회에선 이런 일이 안 통할 것이다. 결정적 흠집이 드러나면 청문 보고서 채택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한 가지 걱정은 된다. 그러다 청문회를 통과하는 대선 후보가 한 명도 없어 대통령 없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혹자는 당연히 그럴 것이며 그러면 어떠냐 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그건 막아야 한다. 청문회를 통과 못 해도 대선 출마는 가능하게 하면 된다. 물론 그런 후보와 그런 후보를 밀어붙인 정당 앞엔 국민의 혹독한 심판이 기다릴 것이다.

 대선 주자 청문회를 통과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총리·장관 청문회도 달라질 것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 그는 자기 같은 사람을 인사 청문회에 올릴 것이다. 총리·장관 청문회는 통과의례가 되고, 국무총리 하나 고르는 데 몇 번씩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서울시장의 ‘황제관사’ 논란 같은 것도 애초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가 대권의 꿈을 꾸고 있다면 말이다.

 이런 일이 현실화되면 지속 가능한 경제처럼, 지속 가능한 정치도 열릴 것이다. 지속 가능한 정치 세상에선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정부는 돈이 사회 전체에 더 평등하게 재분배되도록 할 것이다. 정치적 결정이 가장 영악한 정치인이나 그 정치인을 비호하는 가장 탄탄한 기업, 가장 강력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다수 시민과 사회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뤄지는 세상이 올 것이다(앨런 와이즈먼 『인구쇼크』). 상상해보라. 멋지지 않은가.

 물론 현실로 돌아오면 암울하다. 지속 가능 경제를 말한 미국 메릴랜드대 허먼 데일리 교수는 지속 가능 경제의 최대 적으로 ‘정치적 불가능성’을 꼽았다.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모든 집단이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속 가능 정치도 그럴 것이다. 대선 주자 청문회부터 너나없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그냥 포기하고 마나. 데일리 교수에 빗대면 지금 같은 진영 정치의 끝은 망국(亡國)이다. 정치적 불가능성보다 더 불가능한 ‘원초적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가능에는 바늘 구멍만큼이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다. 원초적 불가능에는 실낱같은 희망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정치적 불가능을 붙들고 씨름하는 쪽을 택하겠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