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07

[백영옥의 말과 글] [345] 지금 여기에 머무르기

조선일보 2024. 3. 16. 03:02 오래전 노트를 보며, 서른 몇 살의 나는 가지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구나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정작 의아한 건 리스트 대부분을 이뤘는데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나 자신이었다. 가지고 싶던 건조기, 식기세척기를 사도 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뭘까. 효율성을 강조할수록 청결 기준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문득 지나간 버킷 리스트에 추가되고 수정된 내 열망의 목록을 보며 내가 길이 아닌 러닝머신 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그곳에서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법이 쉼 없이 달리는 것뿐일까. 머신에서 내려온다면, 전원을 끈다면 어떨까.명상은 전원을 끄고 내려오게 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명상의 핵심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직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명상을..

조력존엄사 선택할 권리, 아직 금기인가 이제 공감인가

중앙SUNDAY 2024. 3. 9. 00:15 수정 2024. 3. 9. 01:08 [비욘드 스테이지] 조력존엄사 다룬 연극 ‘비Bea’ 화제 지난 4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연극 ‘비Bea’(3월 24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의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연극에 관한 토크콘서트는 국내 최초인데다 요즘 화두인 조력존엄사에 관한 내용이라 이목을 끌었다. 낯선 풍경이었지만 특별한 홍보 없이 관객 백여명이 모였는데, 그중 작품을 5회 이상 관람했다는 관객이 십여명, 무려 11차례나 봤다는 팬도 있었다. 2010년 런던에서 초연된 이 작품을 2011년부터 국내에 제안했던 석재원 프로듀서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단어를 자기성찰이나 사랑으로 승화시켜 죽음을 통해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음을 전달하는 ..

[백영옥의 말과 글] [343] 효율과 효과

조선일보 2024. 3. 2. 03:00 수년째 아침에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린다. 효율을 따지면 원두 스틱 커피를 마시는 게 좋지만 커피를 내리며 향을 느끼는 과정이 소중해서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후배가 자주 쓰는 단어는 효율인데, 그녀는 달리면서 팟캐스트를 듣고, 일을 하면서 책상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 믿는다. ‘효과’가 실제 목표에 가까워지도록 일하는 것이라면 ‘효율’은 일을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하는 법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게 정말 ‘효과’적인지에 대해선 고민해봐야 한다. 효율과 효과의 차이는 깨어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수면 시간에서도 드러난다. ‘하버드 불면증 수업’의 저자 ‘그렉 제이콥스’는 사람들은 불면증의 기준을 수면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더 중요한..

“이런 비참함, 물려주고 싶지 않아”… 출산 거부하는 한국인들

국민일보 2024. 2. 29. 00:04 직장인 ‘부부 휴직 의무화’ 1순위 선호 상사 눈치·승진 불이익에 사용 꺼려 英 BBC “한국 노동시장 성장 더뎌”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또다시 역대 최저를 기록하면서 육아휴직 등 ‘있는 제도’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경직된 직장문화부터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도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사회’라는 인식이 자리 잡지 않으면 유례없는 초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28일 고용노동부의 ‘2022년 기준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5038곳 중에서 ‘육아휴직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답한 사업체는 52.2%에 불과했다. ‘일부 사용 가능’은 27.1%, ‘전..

[백영옥의 말과 글] [342] 내 안의 걱정 기계

조선일보 2024. 2. 24. 03:00 월미도에서 대관람차를 탄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재밌었던 대관람차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예상치 않게 너무나 무서웠다. 머리로는 안전하다는 걸 알지만 가슴은 쿵쾅댔고 지상으로 내려오기를 기도하듯 빌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걱정이 많아 걱정입니다’의 저자 ‘그램 데이비’는 걱정이 올림픽 종목이라면 집 안에 금메달이 가득했을 거라고 믿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에 의하면 걱정은 유전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이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걱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산적인 걱정’과 ‘파국적인 걱정’이다. 생산적 걱정을 하는 사람은 미래의 실패를 예비하며 플랜 B를 준비한다. 이때의 걱정은 오히려 그 사람의 경쟁력이 된다. 문제는 파국적 ..

[백영옥의 말과 글] [341] 잘 익은 상처

조선일보 2024. 2. 17. 03:03 이전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썼다. “인생이 서글픈 건, 승자도 결국은 얻어맞기 때문이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상처 없는 얼굴로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복서 따윈 없다. 단지 덜 맞고, 더 맞고의 차이가 있을 뿐.” 살다 보면 누구나 상처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느끼고 살고, 어떤 이는 잊으려 노력하며 산다. 하지만 우리는 ‘내 안의 어린아이’와 살며, 어른이 돼도 상처 입은 마음속 아이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폭력, 어떤 이에겐 냉정함이나 가난이 어린 시절 상처로 남는다....오래전, 배우 최진실 사후 TV 추모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쓰던 옷장에서 나온 공책과 연필을 보았다. 모친은 어릴 적 형편이 나빴던 그녀가 커서도 학용품을 사 모았다고..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어떤 설날-백사마을의 추억

경기일보 2024. 2. 8. 03:01 현재란 모든 흐르는 시간 속에 있다. 10여년 전의 중계동 백사마을이다. 강추위가 온몸을 경직시키던 설날 이곳을 찾았다. 나는 이런 비루한 풍경에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겪은 지난함이 비장한 역전의 힘이 되었기 때문일까. 심리연구가 마크 맨슨은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회복 탄력성을 지닌 한국의 진짜 슈퍼파워일 수 있다고 했다. 성찰할 만한 진단이다. 우울의 내력이 얽혀 있는 전깃줄, 전신주 아래엔 연탄재가 쌓여 있고 굴뚝엔 푸르스름한 연탄가스가 유령처럼 피어올랐다. 카메라를 든 손이 금방 얼 듯한 회색빛 골목엔 때때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할머니가 포..

"내가 살아난다면 1초도 허비하지 않을 텐데!" [고두현의 문화살롱]

한국경제 2024. 2. 7. 00:13 ■ 사형장의 도스토옙스키 28세 때 처형 직전 기사회생 시베리아 유형지서 극한 체험 죽음 너머 발견한 인간의 본성 '자유의 가치'로 불후 명작 빚어 1849년 겨울, 칼바람이 몰아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놉스키 연병장. 수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반체제 지식인들이 끌려 나왔다. 한 장교가 “죄인들을 반역죄로 다스려 모두 총살한다”고 선고했다. 무장한 병사들이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 곧이어 사격 대열을 갖췄다. 일제히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병사들…. 일촉즉발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멈추시오!” 황제의 시종무관이 특사령을 갖고 황급히 달려왔다. 숨을 죽였던 사형수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이날 두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