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중요무형문화재' 부채

바람아님 2015. 7. 14. 08:44

(출처-조선일보 2015.07.14 김태익 논설위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이 있다.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가리킨다. 

한여름 난로는 그렇다 해도 겨울 부채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조선 중엽 문장가 임제(林悌)가 엄동설한에 사랑하는 기생에게 부채를 보냈다. 

그 위에 써넣기를 "겨울 부채를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그대 생각에 타는 가슴 삼복더위보다 뜨겁나니…."


▶옛사람들은 부채가 여덟 가지 덕을 지녔다 해서 팔덕선(八德扇)이라고 불렀다. 

바람을 일으켜 시원하게 해준다. 파리와 모기를 쫓아준다. 어른 앞에서 하품을 가려준다. 

신날 때 장단을 친다…. 마지막이 '해져서 버려도 아깝지가 않다'이다. 

18~19세기 서양 귀부인들은 사교장에서 부채를 은밀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썼다고 한다. 

부채를 오른쪽 뺨에 가져가 그으면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천천히 부치면 "나는 결혼했다", 눈을 긋고 지나가면 "미안하다"는 뜻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중국인은 지금도 여름에 부채를 많이 쓴다. 그들이 인정하는 게 있다. 

"우리가 많은 것을 한국에 전해줬지만 부채는 한국 것이 월등하다." 

고려 때 중국인 서긍이 와 이런 기록을 남겼다. "고려 사람들은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부채를 들고 다닌다." 

서긍이 본 것이 합죽선(合竹扇)일 것이다. 합죽선은 전주 것을 최고로 쳤다. 

전주에는 좋은 한지를 만들 질 높은 닥나무와 깨끗한 물이 있었다. 

담양과 구례에서 곧고 단단한 대나무를 공급받았고 예술적 감각을 갖춘 장인(匠人)이 많았다.


▶이어령씨는 좋은 부채 만드는 일이 대밭 고르는 데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물이 들거나 인가(人家) 가까운 대밭은 빛깔이 좋지 않아 못쓴다. 

베는 시기도 백중을 전후한 음력 7월 한 달 아니면 9월 그믐에서 이듬해 2월까지여야 한다. 

그때라야 대 질이 곱고 벌레가 슬지 않는다. 

하나의 부채에는 고도의 인문학이 담겨 있다.


▶문화재청이 전통 부채 제작 기술을 중요무형문화재 128호로 지정하고 전주에서 그 맥을 이어 온 

일흔두 살 김동식씨를 인간문화재로 올렸다. 

김씨 외가는 왕실에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명인 집안이었고 김씨는 열네 살부터 외가에서 부채 일을 배웠다. 

바야흐로 부채를 찾게 되는 계절, 이번 지정이 전통 부채의 쓸모와 아름다움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부채뿐 아니라 인간문화재가 만든 민속품의 흠은 '작품'으로 평가돼 값이 비싸다는 것이다. 

전통 부채의 운명은 장인의 솜씨를 닮되 얼마나 다양한 값으로 생활 속에 파고드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한국문화재단, 눈으로 담는 문화유산 합죽선(合竹扇)]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