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생각하며오월을 앞두고

바람아님 2016. 4. 30. 00:17
문화일보 2016.04.29. 14:10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오월이 코앞에 왔다. 이 오월만 생각하면 내 생명의 인연을 돌아보게 된다. 요즘처럼 가족이라는 혈연의 관계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때도 없었던 듯하다. 부부도 툭하면 갈라서고 한 집안 안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남처럼 등 돌리고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내 생명이 세상에 나가 힘들게 헤쳐가면서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로 부모나 자식들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가족 간에 인연이 비누 거품처럼 조그마한 바람에 거침없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헤어졌던 암울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전, 내가 열두 살 때 유월 이십팔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아침 한강 둑에서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국군이 수원까지 후퇴했다가 삼사일 후면 다시 서울에 올라올 테니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 모래밭 쪽으로 사라졌다. 피란민 인파가 강변을 휩쓸고 다녀 곧 아버지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한낮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니와 두 동생은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디로 가셨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래밭을 걸어서 나룻배 타러 가시는 걸 보았다고 했다. “강을 건너시더냐”고 어머니가 물었다.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변은 인민군들이 지키고 나룻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칠월에 들어서자 한강에 황소처럼 큰 물체가 둥둥 떠내려왔다. 동네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시체라고 했다. 이 황소처럼 부푼 시체는 커다란 짚동처럼 강물에 드문드문 떠내려왔다. 차마 강물을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건 아닌지 겁이 나서였다. 인민군 치하에 일가친척도 없는 우리 동네는 아침마다 폭격기가 날아와 쏟아붓는 폭탄으로 하늘은 까맣고, 날이 선 쇠 파편들이 전봇대에 꽂히곤 했다.


이 암흑 속에서 어머니는 내 이름을 소리 높여 불러 가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 전란의 한복판에서도 어머니는 어린 우리 형제를 작은 몸으로 보듬고 다녔다. 한강가 야적장 원목들이 쌓인 틈새에 폭격을 피해 숨어 잘 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했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이 조여 오고 아버지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지 못해서 어머니에게 남쪽으로 아버지가 잘 가셨다는 말을 하지 못한 잘못에 눈물이 났다.


짐 보따리를 이고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서울을 떠나 남쪽 어느 야산에 노숙을 하면서도 어머니는 혼잣말로 ‘아버지가 강을 건너가셨어야 하는데’ 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 길고 긴 석 달 동안 어머니가 혼잣말을 할 때면 나는 어디로든 도망을 가고 싶었다. 폭탄이 날아오는 것이나 호박잎만 넣은 풀죽을 먹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버지의 안부’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 무서운 시간이 지나가고, 국군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시월 중순 해질 무렵이었다. 폭격으로 마치 듬성듬성 파헤쳐 놓은 듯 폐허가 된 우리 동네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앉아 있었다. 그때 “동규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목소리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고개를 돌려보니 골목 끝에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나는 일어나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꼼짝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군복 입은 사람이 내게 뛰어와 내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반가움보다는 서러움이 복받쳐 큰소리로 “아버지” 하고 울었다.


전쟁 통에 아버지와 헤어져 있었던 몇 개월은 내게 있어서 아버지와 나라는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뼈저린 시간이었다. 아버지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며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를 알게 됐다. 이보다 더, 어머니의 혼잣말 속에 담긴 가족에 대한 속 깊은 사랑도 내 가슴에 못처럼 박히게 한 것이다.

어느 중년 여성이, 장가보낸 아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잘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가끔 한다고 푸념하는 말을 어제 들었다. 엄마 말이라면 그렇게 잘 듣던 아들이 장가간 뒤로는 며느리 품에 혼이 빠져버렸다는 불평을 하고 있었다. 가족의 유대를 탄탄하게 엮어갈 방법이 걱정이었다. 문득 박덕규 시인의 ‘땀띠’라는 시가 생각났다.


‘녹음 짙은 어느 일요일 학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 시외버스 타고 근교에 놀러 갔다 와서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어서 땀띠가 다 났네 하고 엉덩이 까내렸을 때 엄마는 사다 놓은 얼음을 깨 엉덩이에 대 주시면서 한 손으로는 부채를 들고 힘차게 부쳐 주셨지요. 땀띠 난 살을 부채로 일부러 탁탁 때리기도 하시면서 그러면 나는 짐짓 몸을 움찔움찔해 보였지요 지금도 가끔 혼자 책상에 오래 앉았다 엉덩이가 가려우면 거울 앞에 서서 바지를 내리고 땀띠가 나지 않았나 고개를 돌려 봐요 그러면 어느새 어머니가 오셔서 부채로 엉덩이를 톡톡 쳐 주시지요.’


이 시는 어머니에게 거짓말했던 일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다. 이 거짓말은 어머니에 대한 부끄러움이 되어 그리움의 한 자락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회상이 바로 어머니와 나라는 관계의 설정을 뜨거운 혈연으로 이어주고 어머니의 진실한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가족 간에 생기는 기쁨과 아픔은 분리된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생명의 살아 있는 숨소리처럼 서로 엉켜야 하는 필연의 형상이다. 그러기에 서로를 내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가족의 삶을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