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살며 생각하며작은 나, 큰 나

바람아님 2016. 9. 30. 23:36
문화일보 2016.09.30. 14:50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무수히도 많은 얼굴을 가졌다. 우리네 생명과 관계해서 이 시대를 본다면? 역설적·모순적이다. 우리네 생명은 길어지고도 한결 위태로워졌다. 생명 연장의 꿈이 실현되어 가니 장수 시대다. 백 세 시대, 고령화 시대다. 암도 물리치는 건강 시대다.


한데, 이런 기술 의학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명의 위태로움을 매일같이, 매 순간 경험하며 산다. 지진이 제법 크게 나고 여진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아파트에서 나왔다. 운동장 같은 데서 밤을 지새웠다. 원자력발전소, 핵미사일, 사드 같은 얘기들이 우리를 바짝 긴장시킨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현실에 나타나면 우리네 그 길어진 삶이라는 것도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가 다니는 도로에도, 기찻길에도, 항로나 해로에도 위태로움, 생명의 불안이 놓여 있다.


현대 과학은 우리 삶의 지속을 약속한다. 하지만 죽음은 늘 우리 앞에 있다. 언제라도 무서운 얼굴을 들이댈 태세가 되어 있다. 죽음의 위험 앞에서 위태로워하는 나, 불안해하는 나. 이를 가리켜 신채호는 ‘작은 나’라 불렀다. 그는 ‘큰 나’와 ‘작은 나’를 나누며 이야기를 ‘작은 나’에서 시작했다.


우리가 보기에 ‘나’라고 불리는 것, 눈 코 귀 입 일곱 개 구멍을 갖추고 피부라는 것으로 외부와 내부를 확실히 경계 짓고 있는 것, 그 안쪽에 놓인 것,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나’라 하니, 이는 실상 ‘작은 나’라 했다. 세상에 우연히 나와 80세, 100세, 130세 등 얼마를 살든 언제든 삶을 끝낼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을 가리켜 ‘작은 나’라 했다. 중한 병을 앓은 끝에 코에 산소호흡기를 달고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타까운 노력을 다하지만 끝내 스러지고 마는 우리 각자의 물질적·육체적 경계를 가리켜 ‘작은 나’라 했다.


옛날에 철학의 근본 문제에 관해 설명하는 책을 본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이 세계의 본질이 물질에 있느냐, 정신에 있느냐 하는 것이라 했다. 그때는 그 말을 믿었으나 지금은 반신반의한다. 과연 중하기는 한데, 내가 죽고서야 무엇이 중하며, 그러니 ‘나’의 생명보다 더 중한 문제가 있으랴 싶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을 것 같으니. 그것은 이 ‘나란 무엇이냐’일 것이다.


신채호는 ‘작은 나’의 덧없음을 일찍이 갈파했다. 그는 앞에서 말한 ‘작은 나’를 ‘가짜 나’라 했고, ‘진짜 나’ ‘큰 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각각의 사람의 물질적·육체적 경계를 넘어 그 생명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유동하고, 멀리 가고, 스며들고, 끝내는 죽지 않는 ‘나’, 그것을 가리켜 그는 정신으로서의 ‘나’, 영혼으로서의 ‘나’, 사상으로서의 ‘나’, 궁극에 있어 ‘큰 나’라 했다. 마음에 든다. 늘 깊이 존경하는 사상가의 생각답다. 나의 마음이 타인에게 스며 그이의 마음이 되면, 나는 그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며 영원히, 죽음 없는 생명을 누릴 수도 있으리라. 그것은 가없이 확장되는 ‘나’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이 현세 위에 남아, 살아 움직이는 ‘나’이리라.


한데, 이 ‘큰 나’를 믿는다면 세상의 어려움은 너무 ‘쉽게’ 초극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옛 노래에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 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沙)라’는 것이 있다. 만약 내 꿈속 혼으로 하여금 흔적을 남길 수 있게 한다면 당신 집 문앞의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노랫말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혼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나’는 곧 ‘나의 혼’일 뿐이라면, 고통은 없다. 사랑하는 임은 형체가 있어 보고 싶은 것이요, 체온이 있어 끌어안고자 함이다. ‘내’가 ‘나의 혼’이라면, 보고픔도 없고 끌어안고자 하는 괴로움도 없다.


생각해 본다, 신채호 선생이 구상한 ‘큰 나’를. 사람을 정신과 육체 둘로 나눈, 그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는 방법 말고, 그 전체를 온전히 끌어안으며 ‘작은 나’에 갇히지 않고 ‘큰 나’로 이월하는 방법 말이다. 정신과 육체는 흔한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뒤얽힘 속에 있다. 우리의 ‘나’는 우리 몸에 난 일곱 개 구멍뿐만 아니라, 우리가 비로소 알게 된 몸의 피부에 난 모든 숨구멍을 통해 ‘나’의 바깥을 부단히 내부로 이끌고, 나의 안쪽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변화케 한다. 우리는 이 가시적인 ‘작은 나’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늘 ‘큰 나’를 이루는 다른 ‘작은 나’들에 연결·접속되어 있다.


몸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 역시 본디부터 ‘작은 나’에만 속했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고, 이 ‘작은 나’의 것으로만 끝나는 것도 없다. 궁극에 있어 ‘작은 나’라는 생각이 우리의 감각에 의존하는 환각일 수도 있음을 깨닫고 나면, 비로소 타인을 향한, 아니 ‘작은 나’들이 모여 이루는 ‘큰 나’의 크고 넓은 형상을 우리 마음속에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내 한 몸, 내 한 식구, 내 고장, 내 민족에 국한되지 않는 사랑의 마음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큰 나’의 환각, 아니 가짜인 ‘큰 나’의 위험도 있다. 지금 세상은 저마다 ‘큰 나’를 지어내는 ‘작은 나’가 범람하는 곳이다. 그들은 너나없이 그 자신의 ‘큰 나’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짜 이상에 그칠 때, 사람들은 그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그야말로 헛된 믿음의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