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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찻잔에 봄이 들어왔다

바람아님 2017. 2. 23. 23:21

 아시아경제 2017.02.23 10:46


거실 매화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혔습니다. 봄이 오긴 왔나봅니다. 봄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느끼지 못했을 뿐 이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곁에 시나브로 다가왔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봄 풍경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요. 저에게도 가슴 따뜻한 춘경(春景)이 있습니다. 남녘땅에서 꽃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리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춘경은 월출산 자락에 내려가면 있습니다. 영암군 모정마을에 들어 월출산을 바라보고 가노라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한옥 한 채가 나타납니다. 이름하여 월인당(月印堂). 풀어보자면 '달빛이 도장처럼 찍히는 집'이란 뜻입니다. 황토로 빚은 굴뚝을 높이 세워 놓았습니다. 아궁이에는 잘 마른 소나무 장작이 타면서 내는 불꽃이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고, 아랫목은 그야말로 설설 끓어 넘치는 곳입니다. 월인당 주인장은 김창오(50)씨입니다. 혈기왕성했던 열여덟 살에 서울로 나갔다 1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행복마을을 가꾸는 모정마을 토박이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몇 해 전 이맘때입니다. 영암 취재를 갔다 월인당에 들어 집 주인이 내놓은 차 한 잔에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먼저 툇마루에 앉아 손수 덖은 차를 우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른 봄날 미리 따 놓은 매화 꽃잎도 꺼냅니다. 아직 입을 다문 덜 여문 매화꽃입니다. 그 꽃잎을 따뜻한 차에 띄웁니다. 그러면 차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꽃잎이 스스로 몸을 엽니다. 매화차는 이름만 들어봤던 터였는데 직접 대하니 그윽했습니다. 감탄하며 만개한 매화를, 주인장의 꽃차를 감상했습니다. 입안에서 감도는 차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봄 향기 그대로였습니다. 초목이 아직 추위에 떨고 있을 때 홀로 꽃을 피워 찾아와 준 매화에게 감사했습니다.


매화는 봄을 여는 꽃입니다. 다른 나무보다 꽃을 일찍 피워 낸다고 해서 '화괴(花魁ㆍ꽃의 우두머리)'로 불리지요. 가장 추운 시절인 동지 무렵에 꽃의 정(精)이 자라나기 시작해 봄을 피우는 인동(忍冬)의 화군자(花君子)입니다. 그 살을 에는 날들을 견디느라 그 열매 맛이 그렇게 시어진다고 합니다.


매화는 한밤에 더욱 매혹적입니다.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향기가 희미해 밤이 깊어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은은한 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인당 주인장이 내놓은 매화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달빛입니다. 툇마루 앞에 월출산이 우뚝합니다. 그 위로 달이 뜨면 앞마당에 이름처럼 달이 도장을 박은 듯 환하게 비칩니다. 그럼 찻잔에도 살포시 달이 들어와 앉습니다. 도란도란 세상사는 이야기에 밤이 깊어갑니다. 바람이 싱그럽습니다. 그리운 봄입니다.
  
조용준 사진부장ㆍ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