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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과거와 싸워야 살 수 있는 사람들

바람아님 2020. 2. 5. 08:12


중앙일보 2020.02.04. 00:13

  

전위예술가가 남긴 위대한 족적
전통·권위 부정, 새로움에 도전
구심력 압도하는 파괴적 원심력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1919년 파리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엽서 속의 초상화에 수염을 그려 넣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 아래에 외설적인 제목까지 보탰다. 우아한 자태와 신비한 미소로 400년 동안 만인에게 사랑을 받아오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그 여인은 다름 아닌 ‘모나리자’였다. 그려 넣은 것이 눈썹이었더라면 이해할 만도 하겠지만 살짝 말아 올린 콧수염과 뾰족한 턱수염이라니…. 반 예술(Anti-art) 운동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1887~1968)이 저지른 이 발칙한 도발은 구시대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새 시대를 여는 선언문에 다름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 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서거 400주년이었기에 모나리자가 봉변을 당했을 뿐…. 이렇게 시작된 20세기 예술의 도발적 경향은 다다이즘과 네오다다이즘을 거치며, 소위 전위예술가들의 모험과 실험 정신에 힘입어 예술의 지평을 거침없이 확대해 나간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971년 어느 날,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1925~2016)가 이 사건을 다시 한번 소환했다. “모나리자를 훼손(수염을 그려 넣는 것)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나리자를 죽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과거의 예술은 파괴돼야만 한다.”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의 뒤를 이어 뉴욕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았을 만큼 지휘자로서의 명성 또한 높았던 그는 과거의 음악이 여전히 연주회장과 오페라 극장의 주 레퍼토리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하여 과거와 싸워야만 한다”고도 했다.


20세기 전위예술가들이 남긴 족적은 참으로 위대했다. 사용하던 소변기를 ‘샘’(1917)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여 일상 속의 물건과 조형예술의 경계를 허문 뒤샹의 레디 메이드(ready-mades), 기계문명에 의한 소음과 음악의 경계를 허문 루이지 루솔로(1885~1947)의 소음 음악(noise music), 음들의 조직을 우연에 맡겨 음악으로부터 작곡가의 역할을 배제한 존 케이지(1912~1992)의 우연성 음악(chance operation), 바이올린에 줄을 묶어 거리를 끌고 다닌 백남준(1932~2006)의 행위예술 ‘땅에 끌리는 바이올린’ 등…. 이렇게 20세기 초·중엽의 예술계는 전통적, 아니 19세기까지의 미학적 관점에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기발하고 도전적인, 더 나아가 전통과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움을 확보하려는 생각과 시도가 봇물 터지듯 넘쳐났다.


전위(前衛) 예술을 일컫는 아방가르드는 원래 프랑스의 군사용어다. 글자 그대로 주력부대 앞에 위치하여 적진을 탐색하는 선봉대, 즉 수색대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길을 잃을 수도, 목숨을 잃을 수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만한 값진 정보를 취득할 수도 있다. 예술에 있어서의 전위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지의 영역으로 예술의 지평을 넓히려는 새로운 시도, 즉 전통이라는 구심점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일체의 실험적 예술 행위를 통칭하여 전위예술이라 한다. 전통을 향한 구심력이 원심력을 압도할 때 예술의 영역은 협소해지고 다양성은 위축된다. 어쩌면 블랙홀처럼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겠다. 그러니 구심점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제 스스로 앞장서 뛰어드는 모험가들과 개척자들이 있어야 한다. 동시대, 더 나아가 미래의 예술가들이 걸어갈 만한 길을 앞서 탐색하고 기회비용을 대신 치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고 존재 가치이며 우리가 그들 각자에게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기꺼이 할애하는 이유다.


그 반대로 구심력을 압도하는 원심력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1960년대 초 날카로운 음향 음악으로 전위의 선봉에 섰었고 교향곡 5번 ‘한국’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폴란드의 작곡가 펜데레츠키(1933~)는 전위예술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위예술은 보편성에 대한 오해를 초래하였다. 나는 이 혁신, 실험주의와 형식적 공론이 창조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전통으로 회귀함으로써 형식주의의 함정으로부터 탈출하였다.”


전위예술의 숙명은 전위부대의 그것과 같다. 스스로 택하였건 주어졌건 역할을 다 한 후 역사의 한장에 기록될 수 있음에 만족하고 물러날 때 진정 아름답다. 기회비용을 지불했으니 권리를 누리겠다며 버티거나 청구서를 제시하는 것은 그 용기와 희생을 욕되게 할 뿐이다. 글을 쓰는 내내 20세기 전위적 현대음악의 총아로서 작곡·지휘·교육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불레즈의 한 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혁명은 그것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칭송받을 수 있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