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선우정 칼럼] 미국은 일본에 왜 過去를 묻지 않았나

바람아님 2015. 5. 1. 07:13

(출처-조선일보 2015.05.01  선우정 국제부장)

아베가 지목한 화해 상징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야스쿠니 참배 極右派였다
그에게 쏟아진 미국의 박수는 과거에 몰두하는 한국에 얼음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선우정 국제부장
선우정 국제부장
아베 일본 총리의 행동은 모험처럼 보였다. 
지난 29일 미 의회 연설 도중 갤러리에 앉아 있던 일본의 극우(極右) 신도 요시타카 의원을 
미국 노병(老兵)과 함께 일으켜 세운 일이다. 아베는 그가 '미·일 화해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의 외조부가 2차 대전 때 미국 노병과 같은 전쟁터에서 맞서 싸웠으니 이들의 만남은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2011년 "다케시마(독도)에 가겠다"며 김포공항에서 농성을 벌여 처음 주목받은 인물이다. 
아베 총리의 극우 복심(腹心)을 대변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른 일이 없다. 
야스쿠니가 일본의 대미(對美)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시설이란 건 세상이 다 안다.

아베 총리가 이날 선 연단은 74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일(對日) 결전을 선포한 곳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소리를 지르듯 "역사의 기적"이라며 극우 의원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미국 노병과 악수했을 때 미 의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이때 누군가 그의 전력(前歷)을 들어 항의하고 야유했다면 아베의 방미(訪美)는 성과와 상관없이 망신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베는 과감하게 그를 세웠다. 왜일까? 
자신에 대한 미국 정가(政街)의 관심이 '과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베의 방미 직전 박근혜 대통령은 남미에서 '(과거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는 행동'을 일본에 촉구했다. 
의회 연설 전날엔 윤병세 외교장관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역사 문제와 관련해 세계의 눈이 아베 총리에게 쏠려 있다"며 
"아베 총리가 독일처럼 과거와 깨끗이 단절할 '황금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당국자가 아베의 진정성을 믿고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믿었던 것은 오히려 미국의 진정성이 아니었을까. 
미국 정부와 의회가 진정성을 갖고 아베 총리를 압박할 것이란 시나리오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미·일 양국이 발표한 성명엔 과거 문제가 한 줄도 없다.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도 마찬가지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마디도 과거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국 기자가 던진 일본군위안부 관련 질문에 아베 총리가 읊은 앵무새 답변이 과거 문제의 전부였다. 
당시 아베 총리의 지루한 얼굴을 보면 그의 가슴에 과거사가 어떤 모양으로 둥지를 틀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다. 
그것도 답을 적어 놓은 종이가 워싱턴의 강풍에 날아가면서 눈곱만큼의 진정성조차 어색한 웃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윤병세 장관은 일본에 과거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는 '황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일본은 자국 군사력을 세계로 확대하는 '황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도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중국의 해상(海上) 만리장성을 견제하는 '황금 기회'를 틀어쥐었다. 
'과거사 반성' 요구가 '부동(不動)의 동맹국'이란 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결과가 중·일의 동북아 군비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쯤은 중학생도 안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부가 내놓은 논평은 "진정한 사과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과거사 내용이 전부다. 
미래를 말하는 미·일을 향해 한국은 줄기차게 과거를 말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미국을 지렛대로 아베 총리의 역사관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는 듯하다. 
일본 총리가 미국에서 한국(위안부)에 사죄하지 않았다고 개탄하는 어색한 현실에는 그런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고 강력한 지렛대다. 미국을 통해 일본을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미국을 대하는 한국의 구색이 적어도 일본 수준에 근접해야 한다. 
일본은 중국 주도의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여를 유보했다. 
일본은 미국의 대중(對中) 전선에 핵심 파트너로 참여했다. 
한국이 이렇게 할 수 있나? 이렇게 하는 게 한국의 국익인가? 
이도저도 아니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주장하는 것은 미국을 향해 "쪼고레또 기브 미"를 외치던 반세기 전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이익과 맞지 않으면 200년 전 과거사까지 들춰내는 나라가 미국이다. 
반대로 자신의 이익과 맞으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극우파에게 기립 박수를 쏟아내는 나라가 미국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진정성'이 이런 차가운 세상에서 얼마나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위안부 할머니의 연약한 외침이 미·일 동맹의 틈을 얼마나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한국 외교도 이제 어른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