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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317] 부드러움의 힘

바람아님 2015. 5. 19. 06:55

(출처-조선일보 2015.05.19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그의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1989년 11월 9일 독일 통일의 엄청난 밀물을 온몸으로 맞았던 무용담을 소개한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던 그는 서베를린 슈판다우 지역 난민수용소에서 야간 경비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정부의 여행 자유화 정책이 언제부터 유효한지를 묻는 
한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멋모르고 "지금부터! 바로!"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동독 주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억류된 가족을 만나려 난민수용소 철문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상부의 지시가 있어야 문을 열겠다며 버티던 김 박사는 급기야 권총 위협까지 받자 
열쇠 뭉치를 건네주고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다.

작년 가을 우리나라를 찾은 독일의 생태학자이자 언론인인 캐롤라인 뫼링도 
'독일 통일은 꿈처럼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음악·스포츠·환경처럼 소프트(soft)한 분야부터 하나둘 교류하자 '둑'이 터지듯 
어느 순간 '통일'에 가 있었던 겁니다'라고 말했다(조선일보 2014년 9월 1일자). 
노자는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게 딱딱하고 경직된 것을 이기는 법이다. 이 또한 하나의 모순이지만, 부드러운 게 강한 것이다."

세계적인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노벨평화상 수상자 두 명을 포함한 세계 여성 지도자 30명이 오는 24일 
비무장지대(DMZ)를 북에서 남으로 걸어 종단하는 국제 행사 '위민 크로스 DMZ(Women Cross DMZ)'를 개최한다. 
'소프트한' 분야부터 교류하자는 취지로 우리 정부도 이미 DMZ를 '세계평화공원'이 아니라 
'세계생태평화공원'으로 만들자고 제안한 바 있다. 
생태, 문화, 체육 그리고 시민운동 차원에서 남북 교류를 늘려가다 보면 
어느 날 우리에게도 꿈처럼 통일 한국이 찾아올지 모른다. 
김정운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필연적 인과관계보다는 아주 황당하고 우연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한반도도 분명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