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7.24
궁궐 연회서 춤추던 밀양 기생
밀양시, 묘역 일대 관광자원화
공연 위해 주민에게 칼춤 교육
사당 짓고 마을 담장엔 벽화도
밀양 검무 시연 모습. [사진 밀양관광연구소]
1700년대 초·중반에 활동한 경남 밀양 출신의 기생 운심(雲心)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평생 사랑했던 사람을 생전에 만나지 못했지만 죽고 난 뒤에라도 이곳을 지날 때면 먼발치에서 보고 싶었던 것일까. 마을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신안원(新安院)의 역로(驛路) 가까운 꿀벵이(蜜岩·밀암)에 안장했다.
묘는 밀양시 상동면 신안마을(93가구 220여 명 거주)에서 걸어서 10여 분 떨어진 야산에 있다. 제법 컸던 봉분은 2003년 태풍 매미 때 대부분 유실됐다. 이곳은 경부선철도가 부설되기 전 관원·선비들이 오가는 영남대로(부산 동래~한양) 변이다. 신안마을 윤중태(75)노인회장은 “봉분이 남아있을 때만 해도 벌초를 먼저 하면 혼인이 늦은 처녀 총각이 혼인하게 되는 등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퍼져 매년 누군가에 의해 벌초·성묘가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운심은 조선 영조시대에 칼춤(劍舞·긴 쌍검 춤)으로 이름이 자자했다. 궁궐로 뽑혀 올라가 연회에 참여하면서 당대 유명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서예가 백하(白下) 윤순(1680~1741)은 운심의 비단치마 위에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줬다.
규장각 교리 청성(靑城) 성대중(1732~1809)은 『청성잡기』에서 ‘운심이가 늙어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는데, 관서지방의 칼춤을 추는 기생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였다’고 기록했다.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의 소설 『광문자전(廣文者傳)』에는 ‘운심의 집에서 광문(廣文·거지왕초)이 춤을 구경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운심은 밀양 관기로 있을 때 사대부 출신의 한 관원을 깊이 사모했다. 이 관원도 운심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기생과 양반이라는 신분이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심이는 궁궐로 불려갔고, 그 관원을 보고 싶을 때는 지병을 핑계삼아 고향을 방문했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다 나이 50여 세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관원은 이미 오래전 다른 고을로 전출간 뒤였다.
운심이는 영남대로변 신안원 근처에 주막집을 내고 관원 등이 주막에 들르면 방안으로 빈 술잔을 들이밀도록 하면서 그 관원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십수 년이 지난 뒤 병이 깊어져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운심의 애틋한 사랑은 신안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온다. 10여 년 전부터 운심을 연구해온 장병수(47) 대표는 “역사적으로 한국 검무의 효시나 다름없는 실존 인물”이라고 말했다.
밀양시는 운심의 검무와 러브스토리 등을 관광자원화하고 있다. 올 들어 묘지로 가는 탐방로를 내고 묘역 주변을 정비해 안내판을 세웠다. 마을 주민에게는 공연을 위한 검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 묘 옆에 사당을 짓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마을 담장에 벽화로 그릴 계획이다. 김주명 밀양부시장은 “운심을 전국에 알리겠다”고 말했다.
황선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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