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에 인접한 도시는 이르쿠츠크다. 바이칼호 관광은 여기서 출발한다. 환바이칼 관광열차를 탈 수도 있다. 수년 전에 이르쿠츠크를 찾은 사람이라면 부산에서 수입된 한국 중고버스도 볼 수 있었다. ‘해운대행’ 버스를 타고 자작나무 숲을 지나 바이칼호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과한 별칭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지만 데카브리스트(Dekabrist)와 그 아내들 얘기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 당원’이란 뜻으로 나폴레옹 전쟁 때 서유럽에 원정해 자유주의 사상을 맛본 청년장교들이 모체다. 이들은 1825년 12월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됐다. 121명이 재판을 받아 100여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그 유배지가 바로 이르쿠츠크였다.
보통 유배는 혼자 떠나는데 이례적으로 장교 아내들이 뒤따라왔다. 기혼자 18명 가운데 11명의 아내가 동토로 와서 탄광에서 노역하는 남편들을 보살폈다. 푸시킨은 이들에게 “불운의 충직한 자매/희망은 지하감옥의 어둠속에 숨어있으니/기다리던 그 날은 오리라”라는 시를 바쳤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원래 데카브리스트의 사면과 귀환을 보고 기획한 대하소설이다. 당초 3부로 기획했다가 1부로 끝난 책인데, 2부와 3부가 데카브리스트 얘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톨스토이의 외가 쪽 친척 가운데 데카브리스트가 실제 있었다. 유배지에 온 아내들이 무도회, 연주회, 시낭송회 등을 열어 사교문화를 전파했고 유배지 문화가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됐다.
이르쿠츠크는 우리 역사에선 1921년 6월27일 유명한 ‘자유시 참변’으로 기억된다.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이 ‘붉은군대’와의 싸움에서 960여명이나 전사했다. 이 사건은 이르쿠츠크에 본거지를 둔 고려공산당을 지지한 자유대대와,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한 군대 사이의 내분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항일 독립군의 군사 활동은 사실상 자멸하고 말았다.
바이칼호는 아름답지만 이르쿠츠크에는 역사의 아픈 기억들도 많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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