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만주어는 지금의 중국보다 더 넓은 지역에 세력을 펼치게 된다.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흑룡강 이북 및 몽골 전역, 남쪽으로 남중국해와 만나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카슈가르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의 공용어였다. 지금의 세계 공용어 영어(英語)의 세력을 연상시킨다.
중국 대륙의 정복자 만주족은 처음에는 토착어 중국어(漢語)를 사용하지 못했다. 차츰 중국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빠져 들어 중국화(漢化)된 만주족은 중국어를 쓰기를 좋아하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잊기 시작했다. 1912년 세계 최강의 대청제국이 멸망하자 그들의 공식 언어였던 만주어도 운명을 같이 하여 사라질 위기에 놓여 왔다.
베이징 자금성의 궁궐 전각 현판의 한자어 옆에 붙여진 이상한 문자가 만주어(문자)이다. 꼬불꼬불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문자라기보다 라면 부스러기처럼 보인다. 명(明)대 건축된 자금성 전각의 이름은 모두 한자어였는데 청나라가 자금성을 자신들의 법궁으로 물려받으면서 전각의 이름을 일부 바꾸었다. 그리고 한자어 이름 옆에 만주어를 병기하였다. 조선조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던 언어학자 묄렌도르프가 이러한 만주어를 라틴문자로 전사하는 방법을 고안한 이른 바 묄렌도르프 표기법을 창안하였다.
중화민국이 세워지면서 동화정책에 의해 만주족은 자신의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한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신쥐러(愛新覺羅)성을 가진 황족은 모두 진(金)씨로 바꾸었다. 아이신쥐러가 본래 황금을 의미하므로 진씨가 된 것이다. 만주족 대부분이 동화되었지만 중국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끝자락인 이리(伊犁)강 남쪽의 차부차얼(察布察爾) 시버(錫伯) 자치현에는 만주어가 화석처럼 남아 있다. 금년이 자치현 설립 62주년이 된다.
중국 최대의 영토를 정복한 건륭황제 연간인 1764년에 청의 조정은 새로운 정복지 신장(新疆 New Territory)의 토착인 위구르 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흥안령 산록에서 사냥과 목축을 하던 용맹한 시버(錫伯) 팔기군을 가족과 함께 이주(西遷)시켰다. 18개월이 걸린 민족 대이동이었다. 시버 팔기군은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이주되었으나 항상 푸른 산림이 무성한 동북지방의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염원하면서 살아 왔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신장이 포함될 수 있었던 것도 용맹한 시버 팔기군 수비대가 그 땅을 지켜 주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현재 그들의 후예 3만 여 명이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목화를 재배하면서 250여 년 전 이주 당시의 만주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의 무관심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만주어는 사라지고 있지만 만주어 지명은 과거 만주족(여진족)이 거주했던 중국의 동북지방과 함경도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하얼빈(哈爾濱 어망을 말리는 곳) 하이란강의 하이란(海蘭 느릎나무), 지린(吉林 강변), 쑹화강의 쑹화(松花 은색) 등이 만주어 지명이다. 함경도의 탄광촌인 아오지(阿吾地)는 ‘불타는 돌’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朱乙)은 ‘뜨거운 물’ 두만강의 두만(豆滿)은 ‘만개의 지류’라는 의미의 만주어 지명이다.
러시아의 사할린도 만주어다. ‘검다’는 의미의 사할린은 본래 흑하(黑河 사할린울라)였다. 이 강을 중국은 헤이룽장(黑龍江) 러시아는 아무르강이라고 부른다. 흑하의 지류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된 강의 모습은 검은 색이 아니고 은색이라 쑹화강(銀河)의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사할린의 지명은 만주족이 부른 흑하의 하구에서 보이는 섬 즉 ‘사할린울라 앙가 하다’의 긴 이름에서 다른 말은 없어지고 ‘사할린’만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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