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플러스]
입력 2016.01.28 00:12
시진핑은 7인으로 구성된 집단지도체제를 사실상 자신의 1인 체제로 만들기 위해 어떤 전략을 썼을까. 소조정치(小組政治) 활용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의 최상층부에 영도소조(領導小組)를 만들고 자신이 이 소조를 이끄는 형식으로 말이다.
영도소조는 중국 공산당의 임시기구다. 중국의 정상적인 당정(黨政)통치 방식에 대한 보충이라고 설명된다. 특정 시기에 만들어져 여러 부문을 포괄하는 권력을 갖고 특별 임무를 수행한다.
상설 기구이긴 하지만 고정적인 사무실이 없고 또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평상시엔 종적이 보이지 않다가 큰일을 만나면 모습을 드러낸다(尋常無踪迹 大事現眞身)’는 말을 듣곤 한다.
재미있는 건 리커창 총리가 지휘하는 중국 국무원이 2013년 봄 이런저런 영도소조(領導小組)를 무려 30여 개나 없앤 점이다. 당시엔 정부 기구 간소화와 권한을 하급기관으로 이양하는 간정방권(簡政放權)의 방침이 표방됐다.
그러나 웬걸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4년부터 상황은 180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4년 1월 말 ‘전면 개혁심화 영도소조’가 문을 열었다. ‘개혁’은 시진핑 정권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 개혁을 책임지는 곳이다. 멤버 구성도 최고다. 조장 시진핑(習近平), 3명의 부조장엔 리커창과 류윈산, 장가오리 등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4명이 이 소조의 지도부에 포진했다. 중국 국정의 최상위 기구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어 중국의 대내외 안전문제를 총괄하는 ‘국가안전위원회’가 생겼고, 2월 말엔 “인터넷 안전 없이 국가의 안전이 없고, 정보화 없이 중국의 현대화는 없다”는 시진핑의 말에 맞춰 ‘인터넷 안전 및 정보화 소조’가 닻을 올렸다.
또 3월 중순에는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戰之必勝)”는 시진핑의 요구에 따라 ‘국방 및 군대 개혁심화 영도소조’가 출범했다. 주목할 건 이 모든 소조 또는 위원회의 수장이 시진핑이라는 점이다.
시진핑은 당 총서기, 국가 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당·정·군의 3권을 쥐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소조를 만들고 또 직접 책임자가 되고 있는 걸까.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첫 번째는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비서 출신인 우자샹(吳稼祥)의 분석이다.
우자샹에 따르면 개혁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칼을 들이댔다가는 큰일 난다. 모든 부서, 모든 이권은 알게 모르게 권력의 심층부와 선이 닿아 있다. 이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기득권 세력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
이럴 경우 좋은 방법은 아예 새로운 기구, 즉 새 영도소조를 만들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와 같은 원성, 나아가 보복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설명엔 의문이 따른다. 당에 소조를 만드는 대신 정부 기관인 국무원에 별도의 기구를 두고 문제 해결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진핑의 ‘소조정치(小組政治)’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이 나온다.
그것은 시진핑이 당권(黨權) 강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당이 곧 국가인 당-국가(黨-國家) 체제다. 공산당이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는 이당영정(以黨領政)은 마오쩌둥 시기가 절정기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당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은 전문적인 기술(專)이 필요하다. 붉은 마음(紅)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자연히 당정(黨政) 관계에서 당(黨)보다는 정(政)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장쩌민과 칭화(淸華)대학 수리공정학과를 나온 후진타오 시대의 20년 동안 중국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중국 경제의 급속한 부상을 이끌었다.
그러나 찬란한 햇살 뒤엔 언제나 어두운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고위 기술관료 아버지를 둔 자제들, 즉 관이대(官二代)의 부패가 그것이다. 이들은 부모가 맡고 있는 부문에서 권력과 금전이 유착된 권전교역(權錢交易)을 통해 무한대의 이익을 탐했다.
시진핑은 이제 이 같은 비상 시기를 맞아 당의 비상 기구인 영도소조를 이용해 정(政)의 역할이 커지면서 생긴 부작용을 치유하겠다는 계산이다. 아울러 자신이 직접 수장을 맡았다. 소조정치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지겠다는 이야기다. 배수의 진을 쳤다.
그래서 중국에선 후진타오 시기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중국을 다스리는 구룡치수(九龍治水)의 세월을 지나 시진핑이라는 하나의 달을 중심으로 뭇 별이 그 주위를 도는 중성공월(衆星拱月)의 시대를 맞았다는 말이 나온다. 시진핑의 1인 체제는 바로 자신이 최고 위치에 있는 공산당 안에 ‘소조(小組)’라는 여러 임시기구를 만들고 그 중 중요한 소조들을 자신이 직접 이끄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유상철 기자는 1994년부터 98년까지 홍콩특파원, 98년부터 2004년까지 베이징특파원을 역임했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 간 중국연구소 소장을 지낸 중국통입니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어떻게 변모해나갈까요. 그에 맞춰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나가야 할까요.
유상철 기자의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은 이같은 질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칼럼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을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영도소조는 중국 공산당의 임시기구다. 중국의 정상적인 당정(黨政)통치 방식에 대한 보충이라고 설명된다. 특정 시기에 만들어져 여러 부문을 포괄하는 권력을 갖고 특별 임무를 수행한다.
상설 기구이긴 하지만 고정적인 사무실이 없고 또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평상시엔 종적이 보이지 않다가 큰일을 만나면 모습을 드러낸다(尋常無踪迹 大事現眞身)’는 말을 듣곤 한다.
재미있는 건 리커창 총리가 지휘하는 중국 국무원이 2013년 봄 이런저런 영도소조(領導小組)를 무려 30여 개나 없앤 점이다. 당시엔 정부 기구 간소화와 권한을 하급기관으로 이양하는 간정방권(簡政放權)의 방침이 표방됐다.
그러나 웬걸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4년부터 상황은 180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4년 1월 말 ‘전면 개혁심화 영도소조’가 문을 열었다. ‘개혁’은 시진핑 정권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 개혁을 책임지는 곳이다. 멤버 구성도 최고다. 조장 시진핑(習近平), 3명의 부조장엔 리커창과 류윈산, 장가오리 등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4명이 이 소조의 지도부에 포진했다. 중국 국정의 최상위 기구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어 중국의 대내외 안전문제를 총괄하는 ‘국가안전위원회’가 생겼고, 2월 말엔 “인터넷 안전 없이 국가의 안전이 없고, 정보화 없이 중국의 현대화는 없다”는 시진핑의 말에 맞춰 ‘인터넷 안전 및 정보화 소조’가 닻을 올렸다.
또 3월 중순에는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戰之必勝)”는 시진핑의 요구에 따라 ‘국방 및 군대 개혁심화 영도소조’가 출범했다. 주목할 건 이 모든 소조 또는 위원회의 수장이 시진핑이라는 점이다.
시진핑은 당 총서기, 국가 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당·정·군의 3권을 쥐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소조를 만들고 또 직접 책임자가 되고 있는 걸까.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첫 번째는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비서 출신인 우자샹(吳稼祥)의 분석이다.
우자샹에 따르면 개혁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칼을 들이댔다가는 큰일 난다. 모든 부서, 모든 이권은 알게 모르게 권력의 심층부와 선이 닿아 있다. 이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기득권 세력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
이럴 경우 좋은 방법은 아예 새로운 기구, 즉 새 영도소조를 만들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와 같은 원성, 나아가 보복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설명엔 의문이 따른다. 당에 소조를 만드는 대신 정부 기관인 국무원에 별도의 기구를 두고 문제 해결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진핑의 ‘소조정치(小組政治)’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이 나온다.
그것은 시진핑이 당권(黨權) 강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당이 곧 국가인 당-국가(黨-國家) 체제다. 공산당이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는 이당영정(以黨領政)은 마오쩌둥 시기가 절정기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당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은 전문적인 기술(專)이 필요하다. 붉은 마음(紅)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자연히 당정(黨政) 관계에서 당(黨)보다는 정(政)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장쩌민과 칭화(淸華)대학 수리공정학과를 나온 후진타오 시대의 20년 동안 중국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중국 경제의 급속한 부상을 이끌었다.
그러나 찬란한 햇살 뒤엔 언제나 어두운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고위 기술관료 아버지를 둔 자제들, 즉 관이대(官二代)의 부패가 그것이다. 이들은 부모가 맡고 있는 부문에서 권력과 금전이 유착된 권전교역(權錢交易)을 통해 무한대의 이익을 탐했다.
시진핑은 이제 이 같은 비상 시기를 맞아 당의 비상 기구인 영도소조를 이용해 정(政)의 역할이 커지면서 생긴 부작용을 치유하겠다는 계산이다. 아울러 자신이 직접 수장을 맡았다. 소조정치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지겠다는 이야기다. 배수의 진을 쳤다.
그래서 중국에선 후진타오 시기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중국을 다스리는 구룡치수(九龍治水)의 세월을 지나 시진핑이라는 하나의 달을 중심으로 뭇 별이 그 주위를 도는 중성공월(衆星拱月)의 시대를 맞았다는 말이 나온다. 시진핑의 1인 체제는 바로 자신이 최고 위치에 있는 공산당 안에 ‘소조(小組)’라는 여러 임시기구를 만들고 그 중 중요한 소조들을 자신이 직접 이끄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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