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전범 합사 장소'에서 먹고 마시고 꽃놀이
참배하고 전쟁박물관까지…한중과 역사인식 격차 우려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야스쿠니의 사쿠라(벚꽃)가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벚꽃 구경을 온 30대 초반의 일본인 남성은 '전쟁 때 야스쿠니신사와 벚꽃이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재료였다'는 분석을 기자가 소개하자 이렇게 반응했다.
벚꽃이 활짝 핀 1일까지 최근 수차례에 걸쳐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신사를 찾아가 꽃과 술에 취한 일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침략의 역사를 희석하는 현장이자 우익 사관의 중심지로 비판받는 곳에서 별 저항감 없이 꽃놀이를 즐기는 듯했다.
주차장에는 여행업체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깃발을 든 인솔자를 따라 단체로 방문한 이들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일본 기상청이 도쿄의 벚꽃 개화를 선언하는 기준이 되는 야스쿠니신사의 '표본목' 주변에 몰린 방문자들은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내에는 포장마차 스타일의 간이음식점이 빼곡히 들어섰고 벚꽃 아래에 의자와 테이블이 설치됐다.
다코야키, 야키소바, 우동, 생선구이, 햄버거, 닭꼬치 등이 맥주, 소주, 위스키, 니혼슈(日本酒) 등 일본인이 즐겨 마시는 온갖 술과 함께 끊임없이 팔렸다.
손님을 끄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나들이객의 웃음이 여기저기서 뒤엉켜 먹자골목이나 축제 장소 같은 분위기였다.
어떤 이들은 벚꽃이 하나하나는 별 특별할 것이 없지만 한 덩어리처럼 온 가지를 물들이거나 일제히 피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얘기한다.
벚꽃의 이런 모습이 2차 대전 때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고 한다.
전쟁 중 일본 해군에 널리 퍼진 노래 '동기(同期)의 사쿠라' 가사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너와 나는 두 송이 사쿠라 (중략) 어차피 꽃이라면 져야 하는 것 / 멋지게 지리라, 황국을 위해 (중략) 꽃 피는 도쿄의 야스쿠니신사 / 봄 가지 끝에 피어서 만나자"
인류학자인 오누키 에미코(大貫惠美子)는 저서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원제 ねじ曲げられた櫻<비틀린 벚꽃>)에서 이 곡이 죽은 병사가 벚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군과 야스쿠니 신사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경내에는 관동군(關東軍) 제5군 사령부 생존자모임 등이 심은 기념수 등 일본군과 관련 있는 벚나무가 꽤 있었다.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난 젊은 남성에게 이런 분석을 들려주자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벚꽃을 즐기러 왔을 뿐이며 야스쿠니 신사도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밝혔다.
1936년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에게 이런 설명과 함께 의견을 구하자 '그런 오래된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전범을 합사한 곳에 와서 꽃을 구경하고 술에 취해 즐기는 사이에 전쟁이 낳은 참혹함을 사람들이 잊게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그 말이 맞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벚나무가 많은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인에게 이미 도쿄의 대표적인 벚꽃놀이 장소가 돼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오랜만에 야스쿠니에 꽃구경을 온 김에 영령들에게 "예를 표했다"며 참배 사실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물론 야스쿠니신사에서 꽃 구경을 오는 모든 이들이 침략전쟁과 A급 전범 숭배에 찬성하는 이들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은 그저 벚꽃이 유명하니 찾아오는 것이고 그러면서 야스쿠니신사를 도쿄의 '명소'로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다.
방문자들이 벚꽃만 보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참배는 다반사이며 신사 내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에서 특공대의 자살 공격에 사용되기도 한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 일명 제로센<ゼロ戰, 零戰>) 등을 구경하기도 한다.
1일에는 평일이지만 양복을 빼입고 오전부터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혼자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직장인도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저녁에 단체로 꽃놀이를 올 계획이라서 상사의 지시로 아침부터 자리를 잡으러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오전 7시에 신사에 왔다고 밝힌 한 1년 차 회사원은 "야스쿠니 신사라서 저항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회사 일이므로 특별히 불만을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응했다.
이런 상황에 부닥친 이들은 다른 선택을 하거나 역사를 고민할 기회 없이 야스쿠니신사를 단순한 꽃놀이 명소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벚꽃 나들이객에 관대했다.
경내에 난장이 벌어지고 쓰레기가 쌓이거나 취객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다만 참배 장소에 인접한 일부 영역에서의 음주 회식 등은 제한했다.
야스쿠니신사로서는 벚꽃구경이 사람들의 경계심을 없애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셈이다.
일본군으로 징용됐다가 전사한 아버지 이름을 합사자 명부에서 빼달라며 몇 년 전 찾아온 한국인 유족에게 신사 측이 '참배할 생각이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문전박대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광경이었다.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은 국가 지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옹호하는 마당에 꽃놀이하는 장소에 대한 이방인의 '삐딱한' 시선을 일본 측이 받아들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벚꽃을 보며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친밀감을 쌓은 일본인은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겪은 국가가 왜 참배에 항의하는지 점점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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