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담뱃값 인상으로 민심 잃고 스타일도 구긴 정부

바람아님 2016. 9. 24. 23:59
세계일보 2016.09.24. 10:45

박근혜정부의 담배세 인상이 여권에 악재로 돌아오고 있다.

‘증세없다’는 기조를 유지하려 빼든 묘수가 되레 자충수가 된 꼴이다.

우선 여소야대 지형을 만든 4·13 총선 결과의 원인 중 하나가 담뱃값 인상이었다.


담뱃값 인상이 ‘서민증세’로 각인되면서 여권에 악재로 작용했다는 게 여의도 정치권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새누리당 핵심관계자들은 비보도를 전제로 한 자리에서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담뱃값 인상을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재무관료 출신의 ‘경제통’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4·13총선 기간에 세금을 더 걷어 새누리당이 참패했다는 취지의 볼멘소리를 한 것은 이런 기류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인 변재일 의원도 당선 직후 인터뷰에서 “담뱃값 2000원 인상으로 지난해에만 3조6000억원을 더 걷어가는 꼼수 증세에 국민이 회초리를 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경제지표를 더하면 설득력이 보태진다.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정도로 저물가 흐름 속에 노령층·저소득층이 주로 지출하는 식료품비는 담뱃값 인상 여파로 가파르게 올랐다. 현대경제연구원이 3월에 발표한 ‘저물가의 가계 특성별 영향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60세 이상 가구 지출에서 최대 비중(24%)을 차지하는 것은 식료품이다. 식료품 가격은 2010~2015년 사이에 16% 올라 전체 물가상승률(10%)을 웃돌았다. 지난해 담배세 인상의 영향은 주류·담배 항목의 물가를 전년보다 50% 폭등시키면서 노령층과 저소득층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켰다. 저소득층이자 노령층이 많은 1분위 가구의 소비에서 술·담배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1.9%)은 다른 소득 계층보다 훨씬 높다.


정부는 담뱃값 인상과정에서 제대로(?) 스타일을 구겼다.

뻔히 보이는 업체들의 매점매석 꼼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거액의 세수를 날렸다.

감사원이 지난 22일 발표한 ‘담배세 등 인상 관련 재고차익 관리실태’ 감사결과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해 담배세를 인상하면서 관련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 매점매석 등에 나선 제조·유통사 등으로부터 8000억원에 가까운 담배세 인상차익을 거두지 못했다. 정부는 2014년 12월31일 기준 재고분 담배 5억 갑에 상당한 담배세 인상차익 환수 방안을 사전에 마련하지 못했다. 담배 제조사 또는 유통사가 2014년 12월31일 이전에 담배를 반출, 매입해서 보유한 담배는 담배세 인상일인 2015년 1월1일에는 인상된 가격으로 팔 수 있다. 즉 미리 사거나, 비축한 담배의 경우 제조·유통사들에 돌아간다.


감사원 분석에 따르면 외국계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코리아는 이를 이용해 1739억여원, BAT코리아는 392억여원, 국내 담배업체인 KT&G가 3178억여원, 도매상 1034억원 소매상 1594억여원의 이익을 얻었다. 중앙과 지방정부가 거둘 수 있는 세금 7938억여원이 어설픈 시행착오로 담배제조사와 유통사들 배만 불려준 셈이다.

외국과 견줘보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2009년 4월1일 담배소비세를 올리면서 담배세 인상차액을 4개월 이내에 신고하도록 했다. 일본도 담배세 인상 때마다 관련 법률 부칙에 담배세 인상 직전에 일정 수량 이상의 담배를 보유한 자에게 담배세 인상차액을 신고하고 내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재고차익 부당 귀속 문제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채 담배세 인상에 나섰다. 감사원은 “기획재정부와 행정자치부, 보건복지부가 담배세 인상차익을 국고환수할 수 있도록 입법대책을 갖춰야 했으나 준비가 미비했다”고 지적했다. 정부 관계자도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관련 부처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 관련 부처들은 감사결과를 바탕으로 법 개정 작업에 나선다는 방침이지만 한 박자 늦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매점매석 등에 나선 제조·유통사 등이 거둔 부당이득을 전액 환수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국세청과 지방자치단체들이 일제히 세무조사에 나섰지만 외국계 담배회사들이 거둔 2000억원대 탈세에 한정돼 있다. 이마저도 외국계 담배회사들이 국내 대형 로펌을 선임해 대규모 소송전을 벼르고 있어 만만치 않다.

뒤늦게 뛰어든 지자체와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만족스럽게 진행될지도 미지수다.


지난 7월 지방자치단체 세무 담당 공무원들은 행정자치부 지도·감독 아래 시도간 세무조사 권한 위임 약정 공문을 주고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무조사의 타깃은 외국계 담배회사가 탈루한 담배소비세였다. 정부가 담배세를 인상할 때 필립모리스코리아와 BAT코리아 등 외국계 담배회사 2곳이 2000억 규모의 탈세를 한 정황이 포착되자 감사원이 지자체와 국세청에 세금 추징 조치를 요청했던 것. 경남도는 ‘담배소비세 등 세무조사·범칙사건 조사 합동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렸고, 담배제조창이 있는 양산시는 세무과장을 팀장으로 지방세조사 및 담배소비세 전담인력을 꾸렸다. 


경기도 연천군과 전남 함평·곡성군, 강원 동해시, 경남 사천시 등도 세무조사 권한 위임 약정을 체결하거나 세무조사 TF를 구성했다. 부랴부랴 TF를 꾸리다 보니 전문인력도 부족하고, 노하우도 달려 조사가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지도·감독하는 행정자치부는 최근 담배회사 대상 2차 세무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담배소비세는 지방세로 지자체에 세무조사 권한이 있다. 원래는 국세였으나 1989년부터 지방재정을 확충한다는 취지에서 지방세로 이양됐다. 감사원 통보를 받은 국세청 역시 7월부터 특별세무조사에 돌입했다. 국세청은 지난해 두 회사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 자료에서 재고차익 탈루를 확인하지 못했던 터라 머쓱한 상황이다. 


이천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