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09.26 정미경 소설가)
한때 유행인 줄 알았던 여혐·남혐… 더욱 강해지며 서로 상처 깊어져
끝없는 자기착취로 탈진한 현대인… 사랑 위한 에너지 남아있지 않아
그래도 살아있는 것들의 본성은 따스한 쪽으로 향하는 법이니
대학교의 보일러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 짝사랑하는 여학생 이름을 부르며,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 소리친 남자를 알고 있다. 살짝 과장하면 화력발전소 굴뚝에 육박하는 높이였다.
목숨 건 세레나데에 그녀가 마음을 열었다는 걸 풍문으로 들었으나 그 고백 방식을 지지할 수는 없었다.
예술 쪽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던 그는 이후로 주목할 만한 걸작을 생산하진 못했으니
그 굴뚝 오르기는 자신을 오브제로 한 일생일대의 개념 미술이 된 셈이다.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래전 해프닝이 떠오른 건 양성의 대립이 임계점을 지나는 걸 보면서이다.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래전 해프닝이 떠오른 건 양성의 대립이 임계점을 지나는 걸 보면서이다.
스쳐 지나갈 유행어라 여겼던 '여혐'과 '남혐'의 회오리가 오호츠크해를 지나며 세를 불린
특급 태풍만큼 강렬해졌다.
칼로 자른 듯 두 패로 나뉘어 아무 연관이 없는 사안에조차 '기승전, 혐오'로 이어지는 대립이 십자군 전쟁을 방불케 한다.
동기는 모호하고 상처는 깊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Samsa)는 괴로운 악몽에서 깨어난 아침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Samsa)는 괴로운 악몽에서 깨어난 아침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한 걸 알게 된다. 그로부터 백 년 후, 대한민국 남성은 예지몽도 없이 '한남충'으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눈에는 눈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을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답게 남자들 또한 혐오감 담은 집합명사를 상대방에게 선사했다.
김치녀. 여기엔 전통 발효 식품의 미덕 대신 악취와 부패의 이미지만 가득하다.
페미니즘의 'ㅍ' 소리만 들리면 남자들은 바로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페미니즘의 'ㅍ' 소리만 들리면 남자들은 바로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한 개인의 일탈이나 범죄에도 여자들은 남자 전체를 싸잡아 언어의 독화살을 날린다.
출산과 군 복무에 관한 한 천년 전쟁도 불사할 태세이다.
왜 이 시대는 '이 세상의 절반'에 대한 사랑 대신 혐오를 선택한 것일까.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런 시대적 징후를 흥미롭게 분석해놓았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런 시대적 징후를 흥미롭게 분석해놓았다.
시집만큼이나 얇은 책이 우리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하이데거와 라스 폰 트리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헤겔과 아감벤을 종횡무진 인용하며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지층을 보여주는 방식이 매혹적이다.
사랑 따위 신경 쓸 시간 없다는 우리에게 그는 사랑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란 걸 환기하며
우리가 정작 투쟁해야 할 대상은 세계를 추동하는 시스템이라고 알려준다.
성취라는 미명 아래 끝없는 자기 착취의 쳇바퀴 속에서 탈진해버린 현대인에겐 사랑을 위한 에너지도 시간도 감정적
성취라는 미명 아래 끝없는 자기 착취의 쳇바퀴 속에서 탈진해버린 현대인에겐 사랑을 위한 에너지도 시간도 감정적
여유도 남아 있지 않다.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손쉬운 대체물로 눈길을 돌릴지언정 실재 사랑에 빠지는
만용은 부리지 않는다.
손익분기점을 따지며 사랑마저 '경영'하려 드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사랑은 시작조차 불가능한 과업이 되어버렸다.
책의 비극적 제목이 대개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을 꿈꾸게 한다.
책의 비극적 제목이 대개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을 꿈꾸게 한다.
열외로 두었던 사랑을 재발명해보고 싶다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이란 타자 안에서 죽는 것이며, 그 죽음 후에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란 전언은 무척 유혹적이다.
기나긴 겨울 끝에 만난 나비의 날갯짓처럼.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이 계절이면 외진 국도에서 로드킬당한 뱀을 볼 때가 있다.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이 계절이면 외진 국도에서 로드킬당한 뱀을 볼 때가 있다.
찬피동물도 온기를 찾아 낮 동안 데워진 아스팔트 위로 오르는 것이라 한다.
따스함 쪽으로 향하는 건 살아 있는 것들의 본성이다.
혐 오란, 곧 마음의 겨울이 아니겠는가.
마저 후일담을 밝히자면 그 남자는 이후로도 두 번 더 굴뚝에 올라갔다.
문제는 세 번이나 굴뚝을 오르게 한 여성이 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
하지만 유일함의 미덕이 훼손되었다 해서 그의 낭만적 열정을 비웃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불사하며 사랑을 외쳤던 그는, 사랑의 마그마 쪽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간 용자였던 건 사실이니까.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 옮긴이: 김태환/ 문학과지성사/ 2015/ 109 p 126-ㅎ291ㅇ/ [정독]인사자실(2동2층) |
'人文,社會科學 > 人文,社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연구, 좁은 시야 탓 서구 학계와 불통" (0) | 2016.09.30 |
---|---|
[서지문의 뉴스로책읽기] [15] 백인의 원죄와 흑인의 분노 (0) | 2016.09.27 |
[삶의 향기] 배타적인 성은 곧 감옥이다 (0) | 2016.09.25 |
[행복산책] 주고, 받고, 갚는 인생 (0) | 2016.09.19 |
몽테뉴 "누구나 앞을 보지만, 난 나를 들여다본다" (0) | 2016.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