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6.02.20 03:00
[그 작품 그 도시]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심장이 뛴다는말' - 서울의 어느 종합병원
[그 작품 그 도시]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심장이 뛴다는말' - 서울의 어느 종합병원
흉부외과 의사 정의석이 쓴 에세이 '심장이 뛴다는 말'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아버지의 임종을 직접 보고 싶어 한 딸을 위해 이미 잦아든 환자의 심장을 인위적으로 뛰게 만들어야 하는 의사의 딜레마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의 소원이 1시간 이상 환자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면 약을 투여해야 했고, 편하게 돌아가시도록 해드리는 것이 소원이라면 더 이상 어떠한 조치도 취해선 안 되었다. (…)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심장이 다시 뛰었던 것은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투여한 약들이 뒤늦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딸과 작별 인사를 하고픈 아버지 마음을 들어주신 신의 기적이라 믿으며 장례를 지내고, 그 기억을 지닌 채 평생 살아갈 것이다."
이것을 읽다가 문득 죽음이 내 생각과 달리 '죽어가는 자'와 '남겨진 자'의 역학 관계로 좁혀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약물을 투여해 억지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동안 환자는 틀림없이 엄청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느낀 고통 덕에 그의 딸은 살아가는 동안 따스한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걸까, 남겨진 자들의 기억이 중요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받을 끔찍한 고통과 통증을 알기에 그가 '살기'보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속 풍경은 어떠한 것일까.
또 다른 장면 하나. 가망 없는 어머니를 수술 없이 그냥 편하게 돌아가시게 하겠다는 아들에게 의사가 말한다. 세상에 편하게 죽는 건 없다고, 수술을 안 하면 어머니는 무척 괴롭고 힘들게 지내다가 고통스럽게 죽을 거라고 말한 것이다. 편한 건 보호자이고 어머니는 편하지 않을 거라는 의사 말을 듣다가 아들이 그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럼 수술 받죠."
죽어가는 사람의 가슴을 열어 사람을 살리는 일. 흉부외과 의사인 자신이 알게 된 세상과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세상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게 자신의 몫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해주면 자기 필요에 따라 이야기를 마음대로 도려낸다. 의사인 자신은 그럴 때 마음의 격랑을 참는 것이 아직 힘들다.
그리고 우연히 중환자실 간호사로 오랜 기간 일했던 김형숙의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었다. 고립, 침묵, 분노…. 환자들의 내면을 오려낸 듯한 제목의 챕터에는 내게는 생경하기만 한 중환자실의 풍경이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환자실 입원 후 환자들이 경험하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특별히 기질적 변화 없이도 갑작스러운 의식 변화를 초래한다고 여겨, 이를 중환자실 정신증이라고 한다. (…) 지속적인 긴장감, 움직임을 제한하고 생활의 리듬을 깨뜨리는 치료 환경, 다른 환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상황, 검사나 처치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모든 중환자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을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생각해보면 중환자실은 맨 정신을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치료를 위해 잠들어 있는 환자를 일부러 깨워 CT를 찍고 수없이 바늘을 찔러대 반응을 살피는 일련의 검사는 환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역설적으로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회복력을 크게 해칠 수도 있다.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병원의 환자로 죽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심장이 잦아드는 일은 병원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약물을 투여하고 기도를 절개하고 인공호흡기를 달고, 끝없이 어떤 '조치'를 해 나가기 때문이다. 환자 상태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방해하고, 별수 없이 존엄성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의학적 진단과 소견으로 맞이하는 현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병원 중환자실에서는 죽는 게 가장 힘들다. 한번 입원을 결정하면 퇴원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저자는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병원 중환자실에서 'Hopeless discharge(더 이상 의학적 조치가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의사가 환자에게 선언하는 것)'가 사라졌다고 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경제적인 이유로 조기 퇴원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물었던 보라매병원 사건이 엉뚱하게도 '회복 불가능한 말기 환자'의 임종 장소를 병원으로 제한하는 근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퇴원할 수 있어요?" 하고 묻는 보호자에게 "정 퇴원하고 싶으면 법원 판결을 받아 오세요"라며 맞서기도 했다. 이런 승강이를 거듭하는 가운데 가족과 의료진이 찾아낸 궁여지책은 집 근처 병원으로 전원(轉院)하는 것이다. 어차피 병원에서 맞는 죽음이라 여전히 '객사'라는 문제가 남지만, 집 가까이 간다는 점이 가족에게 조금 위안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 옆에는 고조할아버지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가 곁 제비꽃을 꺾고 낮잠을 잤던 기억이 내겐 생생하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에서 팔순 노모의 죽음은 축제로 승화된다. 집안 식구들과 친지들이 어머니의 치매로 받았던 고통을 회상하면서 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결국 화해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장례 문화에는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위안하는 예식이 존재했다. 사람이 죽으면 병원 영안실이 아니라 평생을 살던 집의 병풍 뒤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위로의 축제가 사라졌다.
책장을 덮고 내 숨이 사라지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나는 인공적인 생명 보조 장치를 매달고 병원에서 내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을 끝까지 살리고 싶어 하는 의료진의 선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료진이 말하는 '호전'이 환자 가족이 기대하는 '호전'과 많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가령 의사들이 말한 '호전'이 혼수상태에서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로 진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무엇이 인간답고 무엇이 나다운 마지막일까.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기타노 다케시가 말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고 이 책의 제목을 한 번 더 묵상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그건 무엇일까.
또 다른 장면 하나. 가망 없는 어머니를 수술 없이 그냥 편하게 돌아가시게 하겠다는 아들에게 의사가 말한다. 세상에 편하게 죽는 건 없다고, 수술을 안 하면 어머니는 무척 괴롭고 힘들게 지내다가 고통스럽게 죽을 거라고 말한 것이다. 편한 건 보호자이고 어머니는 편하지 않을 거라는 의사 말을 듣다가 아들이 그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럼 수술 받죠."
죽어가는 사람의 가슴을 열어 사람을 살리는 일. 흉부외과 의사인 자신이 알게 된 세상과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세상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게 자신의 몫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해주면 자기 필요에 따라 이야기를 마음대로 도려낸다. 의사인 자신은 그럴 때 마음의 격랑을 참는 것이 아직 힘들다.
그리고 우연히 중환자실 간호사로 오랜 기간 일했던 김형숙의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었다. 고립, 침묵, 분노…. 환자들의 내면을 오려낸 듯한 제목의 챕터에는 내게는 생경하기만 한 중환자실의 풍경이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환자실 입원 후 환자들이 경험하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특별히 기질적 변화 없이도 갑작스러운 의식 변화를 초래한다고 여겨, 이를 중환자실 정신증이라고 한다. (…) 지속적인 긴장감, 움직임을 제한하고 생활의 리듬을 깨뜨리는 치료 환경, 다른 환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상황, 검사나 처치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모든 중환자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을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생각해보면 중환자실은 맨 정신을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치료를 위해 잠들어 있는 환자를 일부러 깨워 CT를 찍고 수없이 바늘을 찔러대 반응을 살피는 일련의 검사는 환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역설적으로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회복력을 크게 해칠 수도 있다.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병원의 환자로 죽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심장이 잦아드는 일은 병원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약물을 투여하고 기도를 절개하고 인공호흡기를 달고, 끝없이 어떤 '조치'를 해 나가기 때문이다. 환자 상태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방해하고, 별수 없이 존엄성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의학적 진단과 소견으로 맞이하는 현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병원 중환자실에서는 죽는 게 가장 힘들다. 한번 입원을 결정하면 퇴원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저자는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병원 중환자실에서 'Hopeless discharge(더 이상 의학적 조치가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의사가 환자에게 선언하는 것)'가 사라졌다고 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경제적인 이유로 조기 퇴원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물었던 보라매병원 사건이 엉뚱하게도 '회복 불가능한 말기 환자'의 임종 장소를 병원으로 제한하는 근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퇴원할 수 있어요?" 하고 묻는 보호자에게 "정 퇴원하고 싶으면 법원 판결을 받아 오세요"라며 맞서기도 했다. 이런 승강이를 거듭하는 가운데 가족과 의료진이 찾아낸 궁여지책은 집 근처 병원으로 전원(轉院)하는 것이다. 어차피 병원에서 맞는 죽음이라 여전히 '객사'라는 문제가 남지만, 집 가까이 간다는 점이 가족에게 조금 위안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 옆에는 고조할아버지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가 곁 제비꽃을 꺾고 낮잠을 잤던 기억이 내겐 생생하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에서 팔순 노모의 죽음은 축제로 승화된다. 집안 식구들과 친지들이 어머니의 치매로 받았던 고통을 회상하면서 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결국 화해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장례 문화에는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위안하는 예식이 존재했다. 사람이 죽으면 병원 영안실이 아니라 평생을 살던 집의 병풍 뒤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위로의 축제가 사라졌다.
책장을 덮고 내 숨이 사라지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나는 인공적인 생명 보조 장치를 매달고 병원에서 내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을 끝까지 살리고 싶어 하는 의료진의 선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료진이 말하는 '호전'이 환자 가족이 기대하는 '호전'과 많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가령 의사들이 말한 '호전'이 혼수상태에서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로 진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무엇이 인간답고 무엇이 나다운 마지막일까.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기타노 다케시가 말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고 이 책의 제목을 한 번 더 묵상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그건 무엇일까.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김형숙의 에세이, 심장이 뛴다는 말―정의석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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