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03.27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얼마 전 향년 84세에 세상을 떠난 석학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학자이자 소설가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20세기 최고의 ‘중세학적 소설가’ 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그의 첫 작품 《장미의 이름》은 중세기 스콜라 철학의 최대 고민거리였던
‘보편성’(Universal) 문제를 흥미로운 추리소설로 해석한 바 있다.
다시 한번 기억해 보자. 소설의 배경인 수도원은 아마도 이 세상에 단 한권 남아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보관하고 있었다. ‘비극’을 주제로 한 《시학 1편》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2편에서 ‘희극’을 설명한다.
하지만 우주는 조물주가 창조하지 않았던가? 모든 웃음은 비웃음이기도 하다.
신이 창조한 세상을 비웃는다는 것은 신을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을 담은 책이다!
시학 2편의 존재를 숨기려는 도서관장은 결국 책을 읽으려는 수도승들을 살인하기 시작한다.
장미의 이름은 물론 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미의 이름 보다 더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은 과연 존재했을까? 아마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재 남아있는 시학에서 비극의 기원과 역할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는 “추후 희극에 대해서도 설명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희극을 다루기도 전 문장 한 중간에서 끝나버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읽었던 플라톤과 대부분 동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다.
기원 후 3세기 학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445,270줄의 글을 출간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남겨진 글은 110,000줄 정도다. 3분의 1의 글이 지난 1800년 동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라에리티우스가 남긴 목록의 제목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목들과는 전혀 다르며,
대부분 책들은 플라톤과 같이 문답 형식으로 출간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출간한 책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늘날 남아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은
그의 책 또는 강연을 기반으로 누군가가 요약⋅편집한 글들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작품들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된 시학 2편은 이런 요약⋅편집 단계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는 주장이다. 1643년 발견된 저자 없는 ‘트락타투스 코이슬리아누스’
(Tractatus coislianus)라는 이름의 고대 문서는 희극의 기원과 의미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코이슬리아누스’의 저자는 누구였을까?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시학 2편은 바로 코이슬리아누스
번역판이었다. 에코와 같이 역사학자 월터 왓슨 역시 코이슬리아누스야 말로
그동안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작성했을
수도 있는 ‘웃음의 미학’을 우리가 어쩌면 1800년 만에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미소를 감출 수 없다.
Walter Watson
《The lost second book of Aristotle’s Poetics》
2015, University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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