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3.18 03:07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매화 지고 달이 찼다 창 밑에는 매화가 몇 가지 피고 창 앞에는 보름달이 둥글게 떴다. 맑은 달빛 빈 등걸에 스미어 드니 시든 꽃을 이어받아 피고 싶은가. | 梅落月盈 窓下數枝梅(창하수지매) 窓前一輪月(창전일륜월) 淸光入空査(청광입공사) 似續殘花發(사속잔화발) |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 ~1805)가 청년 시절에 지었다. 매화에 죽고 못 사는 문인이 많던 시대에 감수성 예민한 시인 박제가는 매화가 지는 아쉬움을 시로 달랬다. 창밖에 서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꽃이 피어 황홀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꽃이 이제는 거의 다 져서 서운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 밤은 고맙게도 달이 휘영청 밝은 보름께, 환한 달빛이 매화가 져버린 빈 가지 위에 쏟아졌다.
그때 내 눈을 의심했다. 전처럼 가지에 매화가 다시 핀 것이 아닌가! 아! 저 달빛조차 이미 떨어진 매화잎으로 되살아나 빈 가지 위에 꽃을 피우고 싶은가 보다. 매화가 지고 난 뒤에도 매화의 환영(幻影)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당분간은 매화 향기에 젖어들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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