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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을 조선일보는 어떻게 보도했을까

바람아님 2017. 4. 19. 23:14
아시아경제 2017.04.19. 15:07

[신문읽는기자]악몽의 밤 샌 서울..밤비에 허술히 진 낙화들

4·19 혁명. 1960년 4월 제1공화국 자유당 정부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개표를 조작했다(3.15 부정선거). 이에 반발하여 학생들이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마산 3·15 시위에 참여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만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다.

부산일보가 이 사실을 보도한 뒤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된다. 4월 19일 경무대(대통령 관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총을 쐈다.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다.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한다. 이 피로 쟁취한 혁명으로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한다. 오늘은 57년전 그 빛나는 기억을 간직한 날이다.


부정투표에 항의하는 시민들.사진=국가기록원

그 해 조선일보(4월20일자) 신문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혁명의 현장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한다. 제목은 이렇게 뽑혔다.

(* 1960년 당시 서울 지역에서 발행되고 있던 신문은 조선일보, 동아일보(1920년 창간), 서울신문(1945년 창간), 경향신문(1946년 창간), 한국일보(1954년 창간)였다. 당시 각 신문들의 논조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평가된다. 중앙일보와 매일경제, 한겨레 등의 신문은 1960년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1965년에 창간했으며 매일경제는 1966년에 나왔다. 한겨레와 국민일보는 1988년에 등장했고 세계일보는 1989년에 선보였다. 문화일보는 1991년에 나왔다.)


간밤의 먹구름도 차츰 개어가고
악야(惡夜) 샌 서울
밤비에 허술히 진 낙화들...


마치 카메라로 찍어낸 듯한, 당시 장면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자. 서정적이면서도 깊은 연민을 지닌 문장으로 씌어진 이 글은,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는지 보여주는, 의미있는 교과서일 것이다.

1960년 4.19 이튿날 조선일보.

‘스크람’을 짠 ‘데모’학생들의 노래소리 아우성소리와 총소리로 낮게 덮은 하늘이 저물어 계엄령하의 통행금지 시한 저녁 7시에 발걸음을 재촉하던 통행인들도 끊어진 서울거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소리에 가슴을 서늘케하던 하룻밤이 밝았다.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히 젖은 보도 위를 달리는 군용차며 5시 조금 지나서부터 행인들이 하나둘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엔 꿈속엔들 잊고싶은 지난 하루와 한밤의 일들이 다시금 새로와져서 신문 파는 소년들을 부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잦았다.

1960년 4.19 이튿날 조선일보.

도심지 가까운 곳의 큰길이나 타버린 파출소는 말끔하게 치워져서 처참했던 지나간 하루의 일을 씻어주고 있었으나 동대문 밖에 나서서부터는 도심지대의 질서만큼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 하여 길가에는 돌멩이가 수없이 굴러있었으며 경찰관의 그림자가 잘 눈에 띠지 않고 헌병차가 바삐 내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설동 로타리에서 돈암로로 향하는 신설동 길목에는 경찰 백차가 서서 일반차량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일 데모에 참가했던 대학생 및 청소년 약 1천2백여명이 고려대학교 구내에서 밤을 새우고 계속 항거할 기세를 보이자 군지휘관은 20일 이른 아침 학생대표를 만나 해산할 것을 종용하여 무기를 가지고 있던 40여명만을 연행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원만히 수습되었다.

한편 이날 아침 채 햇살이 퍼지기도 전에 간밤에 돌아오지 않은 아들 딸 오빠 동생을 찾아 병원을 찾는 사람이 초조로이 병원 문앞에서 서성대고 있었고 세브란스병원과 대학병원에서는 사망자와 부상자를 정문에 써붙여 행여나 하며 불안에 찬 눈으로 이름을 찾는 모습들이 애처로웠다.

죽음을 각오한 혁명으로 일궈낸 대한민국을, 한바탕 새롭게 진화시킬 역사의 벽두에 서 있는 요즘. 저 4.19 이튿날의 비장한 아침은 새삼 가슴을 쿵쿵거리게 한다.

현실은 어떤가.


어린 4월의 피바람에 모두들 위대한 훈장을 달고 혁명을 모독하는구나 - 박봉우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중에서.

이 시를 읽노라면 묘한 느낌이 든다. 4.19 이후 혁명정신은 증발하고 혁명의 단 것들만 취하는 무리를 향한 좌절 섞인 일갈이지만, 왠지 박봉우의 저 비판이 촛불 이후 허파에 바람 들어간 듯 대선에 인성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참담한 권력을 끌어내리기 위해 분노를 일상적인 표정으로 순화시키며 가만히 촛불을 들어 청와대의 속을 바작바작 타들어가게 하던 어린 혁명이 세상을 바꾼 뒤, 수고를 가로채는 얌체처럼 위대한 훈장을 제 가슴에 달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박봉우가 부르짖는 것 같다.

처음의 가녀린 촛불의 마음 앞에 겸허해지는 게, 이 땅의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디지털뉴스본부 이상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