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서소문 포럼] 한국 교육의 실패를 증명한 TV토론

바람아님 2017. 5. 5. 08:25
중앙일보 2017.05.04. 02:51

변호사·검사·의사 출신이 말하기에는 낙제 수준
설득력 갖춘 리더 못 기르는 잘못된 교육의 상징
이상언사회2부장
보기에도 민망한 지경이었다. 그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본인들도 후회막심일 것이다. 유력 대선주자들의 TV토론 얘기다. 총 5회 중 뒤의 4, 5회는 그나마 나았지만 앞의 3회는 목불인견 수준이었다. 1번 후보는 동문서답이나 호통 대응으로 ‘제2의 박근혜’ 논란을 불렀고, 그를 쫓고 있는 3번 주자는 “아닙니다”를 남발하다 ‘갑철수’와 ‘MB 아바타’만 유권자에게 각인시키는 자충수까지 뒀다. 2번 후보는 화끈한 발언으로 지지 기반에서는 점수를 좀 땄는지 모르겠으나 2030 유권자들에게는 꼰대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잘못만도 아니다. 변호사, 검사, 의사가 됐으니 우리 사회의 통상적 기준으로는 공부 잘한 사람들이다. 한국 교육의 성공 모델에 속한다. 그런데 성장 과정에서 토론에 대한 태도나 방법을 배울 기회는 별로 없었다. 인생을 좌우할 시험 성적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학교 밖의 상황도 비슷했다. ‘말 많으면 공산당, 말 잘하면 사기꾼’ ‘밥 먹을 땐 밥만 먹자’는 표현이 거침없이 사용되던 시절이었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토론 경험 없이 사회로 나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자연과학 연구가 활발해진 근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서구 고등교육의 커리큘럼은 3학(문법·수사·논리)과 4과(산술·기하·음악·천문)였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연원을 두고 있는 일이다. 중세에 철학과 신학이 그 위에 얹혀졌지만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말로 다른 사람을 잘 설득하게 하는’ 공부인 3학은 여전히 대학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전공이 따로 없는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하버드·예일 등 미국 명문대의 토론과 교양 수업 중시, 영국 옥스퍼드·케임브리지의 구술시험이 ‘화석 증거’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전국 표준시험(A-Level) 성적과 자기소개서를 보고 정원의 약 세 배로 지원자를 추린 뒤 교수의 물음에 자신의 생각을 말로 답하는 시험으로 신입생을 선발한다.


또 있다. 영국의 오래된 사립 중·고교에서는 대개 라틴어를 가르치는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43년 사망)의 글이 교재에 자주 등장한다. 적어도 교과서 안에서는 로마 시대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 위대하다. 집정관에 당선되며 로마 시대 최초로 ‘국부(國父)’ 호칭을 얻은 키케로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다. 그의 말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카틸리나 탄핵 연설’이다. 이런 대목이 유명하다. “로마인의 신성한 특권인 자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부정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시민의 절규도, 국가의 권위도, 정의의 공분도 그의 재력 때문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는 웅변의 고수들로부터 공감과 공분을 이끌어내는 연설 방법을 배웠다. 그렇다고 단순한 기술자도 아니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키케로는 대학자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인이기도 했다’고 평가돼 있다.


서양 교육에서 토론과 스피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지속되는 것은 정치인과 관료 등의 사회 리더들을 육성하는 일과 연결돼 있다. 명료한 주장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공공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을 키우는 데 이 전통의 목적이 있다. 서양에서 성공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처칠·대처가 그랬고, 케네디·오바마도 그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론에서는 막말로 상대를 비방하는 일을 금기로 여긴다. 본래의 목적을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번 후보가 다른 후보에게 “덕이 없다”는 말을 던지는 장면은 끔찍했다. 그의 “버릇없이” 발언도 마찬가지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어서 그런지 다섯 후보들의 토론 태도와 내용은 막판으로 갈수록 다소 좋아졌다. 하지만 그중 한둘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국민을 설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수준을 드러냈다. 야당의 협조를 얻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을 이해시키려면 이런 일에 장점이 있는 총리·장관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행히 TV토론 촌극에서도 얻은 것은 있다. 우리 교육이 잘못된 길을 아주 오래 걸어왔음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이상언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