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5.09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정치인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다.
보슬비가 내리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하던 중 그가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직접 저지른 죄도 아니건만 사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들을
대신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독일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를 증언하는 곳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일본에는 언제나 브란트 같은 총리가 나오려나.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조선일보 DB
이만큼 극적은 아니지만 내게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
정치인이 또 한 명 있다.
2008년 11월 28일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근대 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10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 있는
그의 집을 예방했다. 등이 동그랗게 굽도록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노학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대통령의 얼굴에는
선생님 말씀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 집중하는
어린아이의 진지함과 천진함이 배어났다.
나는 평소 사르코지 대통령의 경박스러움에 종종 눈살을
찌푸리곤 했었는데 이 일로 인해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오늘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예전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협치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상황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성패를 가름할 것이다.
새 대통령님께 제안 한 가지 드리련다.
정치판에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훈수하기 바쁜
그런 어른들 말고 묵묵히 일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진정한 어른들을 찾아뵙고 혜안을 얻으시기 바란다.
여론이 불리해지면 청와대로 사회 원로와 종교 지도자들을 불러들이던 역대 대통령의 행태를 답습하지 마시고
손수 찾아뵙고 가르침을 얻으시라.
겸허는 타고난 품성 자체가 그렇지 못한 정치인에게는 실천해 보이기 매우 어려운 행동이다.
오늘 가장 겸허한 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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