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토요일 오후 봄볕이 거실에 담요 한 장을 펴고 누웠다. 나는 그 따뜻한 봄볕 담요 위에다 빨래를 갠다. 1970년대 말 미국 유학 때부터 시작해 어언 40년 가까이 해왔건만 빨래를 개는 일에는 늘 작은 설렘이 있다. 보송보송 마른빨래의 귀를 맞춰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애꿎게 흩어져 서로를 찾아 헤매는 양말들을 짝 지워 한데 묶노라면 어느덧 내 삶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느낌이다.
'씻어 말린 빨래를/
하늘에서 걷어와/
이치에 맞게 접어/
서랍장에 정리하네/
마음도/ 곱게 접으면/
정리하기 쉬워질까.'
금혜정 시인이 쓴 '빨래를 개며'라는 시조다.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하던 기간 거의 내내 나는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 하루 종일 연구와 강의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찌든 몸과 마음을 널어 말리고 싶건만 휴식은커녕 거기에도 또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숙사는 집이 아니라 학교의 연장이었다.
어느 해인가 우리 줄 꼭대기 층에 사흘이 멀다 하고 광란의 파티를 열던 녀석이 있었다. 허구한 날 꼭두새벽에 굳게 잠긴 문을 열어젖혀 고막을 찢을 듯한 음악을 복도로 끄집어낼 때까지 녀석의 방문을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두들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 시간에 나는 녀석에게서 뜻밖의 고백을 들었다. 빨래 개는 시간을 제일 좋아한단다. 마음도 덩달아 말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나 원 참. 하기야 그 녀석인들 왜 밤새 술과 음악에 전 마음을 곱게 다시 개고 싶지 않으랴?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 꼭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과연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이치에 맞게 접어'줄 수 있을까? 구겨질 대로 구겨진 이 나라의 자존심은 과연 누가 풀 빳빳이 먹여 다시 세워줄 수 있을까? '빨래는 저절로 개지지 않는다'는 서양 격언이 있다. 국격도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투표하는 일이다. 국민과 마주 앉아 차분히 개혁의 빨래를 함께 갤 그런 대통령을 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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