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비누 조각 숙제로 불상을 깎았는데 그게 어쩌다 미술 선생님 눈에 들어 졸지에 미술반에 영입되고 급기야 잠시나마 미대 진학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나는 지금도 예술 분야 중 미술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대학 시절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 로트레크의 퇴폐와 모딜리아니의 우수, 그리고 무엇보다 샤갈의 환상을 사랑합니다." 결코 짧지 않은 미국 생활 중에 나는 이 화려한 목록에 호안 미로와 파울 클레를 보탰다.
나는 우리나라 화가 중에서는 장욱진 화백을 특별히 좋아한다. 김환기 화백도 좋아하는데 요즘 고가에 팔리고 있는 추상화보다 '사슴'과 같은 그의 초창기 그림을 더 좋아한다. 장욱진과 김환기의 그림에는 청결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다. 지난 토요일 나는 '장욱진이 그린 세상―가족, 집, 나무, 새, 그리고 바람'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그 강연에서 나는 감히 장욱진 화백에게 '생태화가'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헌정했다. 그가 그리는 집과 가족과 나무와 새는 서로 따로 존재하지 않고 늘 함께 어울려 있다. 그는 바로 자연 생태의 핵심인 공존(共存)을 그린 것이다. 자연을 늘 저만치 두고 경외의 대상으로만 그린 서양의 풍경화와 달리 장욱진의 그림에는 정경교융(情景交融)의 미학이 배어난다. 그의 작품 세계 속 인간은 언제나 자연과 함께 있다.
오는 26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장욱진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개막 행사가 열리고 앞으로 순회 전시가 서울에 이어 부산과 세종시를 찾을 것이란다. 2013년 가을 국립생태원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며 나는 이제 '개발 문화'를 접고 "생태 문화 확산을 도모하여 지속 가능한 미래 구현에 기여"하자는 미션을 내걸었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모니터 가득 장욱진 화백의 '풍경'을 펼쳐 놓았다. 광활한 자연 한가운데 집보다 더 큰 까치가 난다. 과학 논문 수백 편보다 때론 그림 한 점의 힘이 훨씬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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