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6.05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축구 파워' 南美 행복감도 높아… 일상 대하는 여유 축구에도 반영
조급해하고 쉽게 불안감에 빠지면 축구 성적과 행복감 모두 저하돼
백패스는 안전하지만 골 못 넣듯 안전만 추구해선 행복 확률 낮아
지난주는 축구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긴 시간이었다.
FIFA U20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파죽지세로 예선을 통과했지만
포르투갈과의 결선 첫 경기에서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했다.
2002년을 떠올리며 큰 기대를 했던 축구 팬들의 실망은 컸다.
성급하게 한국의 8강전 경기까지 미리 예매해 놓았던 사람들(가령, 필자)의 허탈함은 더했을 것이다.
축구는 이상한 경기다. 사실 여럿이서 둥근 공 하나를 상대 진영으로 차는 단순한 경기지만,
국가 대 국가가 축구 시합을 하면 가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비장함이 연출된다.
일본에서 벌어졌던 1998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 최종 경기를 우리는 지금까지도 '도쿄 대첩'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축구 경기 때문에 실제로 전쟁을 한 적도 있다.
다른 스포츠 경기에 비해 축구는 비교적 많은 선수가 호흡을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각 대표팀의 경기 스타일에는 그 나라 특유의 문화적 색채와 근성이 묻어난다.
독일 축구는 잘 돌아가는 기계에 비유되며 프랑스 축구는 '아트 사커(art soccer)'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축구를 특별히 잘하는 국가들이 가진 어떤 문화적 특성이 있을까?
축구 실력이 단지 국가의 경제 수준과 비례한다면 한국이나 일본, 혹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확고한
축구 강국이 돼 있어야 한다. 이런 다소 엉뚱한 질문을 갖게 되는 이유는 남미라는 대륙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남미는 국제 정치·경제를 주도하는 대륙은 아니다.
그러나 두 영역에서만큼은 남미는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는데, 그중 하나는 축구다.
월드컵이 열리는 해가 되면 다소 변방에 있던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같은 나라들의 존재감 자체가 달라진다.
펠레, 마라도나와 메시 같은 축구 아인슈타인들 또한 모두 남미 출신이다.
흥미로운 점은, 남미가 축구만큼이나 월등한 성적을 내는 분야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행복이다. 수많은 국제 자료에서 중남미 국가들은 경제 수준 대비 이상(?)할 정도로 높은 행복감을 보고한다(참고로, 부탄이나 방글라데시가 행복하다는 보도는
학계의 정설과 다르다).
남미를 여행한 한국 사람들에 의하면 그들은 우리에 비해 일상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가 넘치며
무엇보다 잔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긍정적 기질과 그들의 '삼바' 축구가 관련이 있을까?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100여 국의 행복 수치와 FIFA 축구 순위의 상관관계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정말 행복 수치가 높은 국가일수록 축구 순위가 유의미하게 높았다.
과학적 주장을 펼치기에는 부족한 자료지만, 아마추어 축구 팬의 눈에는 어쨌든 행복과 축구는 닮은꼴로 보인다.
한국 팀의 축구 경기에는 행복한 문화에서 목격되는 여유나 즉흥성이 부족해 보인다.
큰 경기에서 우리 팀은 마치 쫓기듯 급하게 경기를 운영하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지 동료 선수가 좋은 공간을 확보하기도 전에 급히 '처리'해 버리는 패스가 많고,
상대를 흔드는 도발적인 패스 시도보다는 안전한 백 패스를 더 자주 한다. 방패가 아니라 창의 날카로움으로
승부가 갈리는 축구 경기에서 이런 소극적인 전략으로는 최정상을 밟기가 어렵다.
서울대 의대 연구진이 지난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삶의 질을 따질 때 한국인이 꼽는 최우선적 조건 중 하나가 '안전'이라고 한다.
심야의 거리를 걱정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지구의 거의 유일한 대도시에 살면서도 우리의 불안과 걱정 수위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높다. 그래서 진취적 도전이나 모험적인 선택보다는 모으고 지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하지만 많은 심리학 연구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백 패스에 주력하는 인생에서 행복이라는 골은 자주 터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산책] 목차 행복해지기 위해 시험보다 중요한 것들 (2017.11.20) 긴 휴가, 준비되셨나요?(2017.09.25) "소셜미디어 속 멋진 인생에 흔들리지 마라"(2017.07.24) 축구든 인생이든 즐겨라 (2017.06.05) 물건보다 경험을 사고, 혼자 쓰기보다 함께 즐겨야 (2017.04.24) 행복,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몫 (조선일보 2017.03.13) 설날 최고의 덕담, "더 많이 움직이세요"(조선일보 2017.01.25) 마음의 벽, 조금만 낮춘다면(조선일보 2016.10.31) 주고, 받고, 갚는 인생(조선일보 2016.09.19) 금메달의 기쁨? 석 달이면 녹는 아이스크림(조선일보 2016.08.1) 칭찬받고 추는 춤, 좋아해서 추는 춤(조선일보2016.06.29) 결혼은 행복, 이혼은 불행?(조선일보2016.05.16) '배부른 돼지'에게도 잔치는 필요하다(조선일보 2016. 04. 04) |
'人文,社會科學 > 人文,社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5)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푸시케’ (0) | 2017.06.09 |
---|---|
[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사드 반입은 이적 행위 아니잖아요 (0) | 2017.06.06 |
[졸리앙의 서울이야기] (30) 황소의 능력과 책 읽기 예찬 (0) | 2017.06.04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 샤갈의 ‘거울’(1915) (0) | 2017.06.01 |
[서지문의 뉴스로책읽기] 천수답으로 복귀하자는 건가? (0) | 2017.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