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라는 용어가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했을까? 처음에는 필경 '과학과 기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라고 해서 과학과 기술이 완벽하게 동등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양쪽을 아우르겠다는 의지는 엿보였다. 한동안 '과학·기술'로도 표기하다가 끝내 그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운뎃점을 빼버리고 이제는 종종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이제 많은 이들에게 '과학과 기술'보다는 '과학적 기술'이라는 의미로 다가간다. 과학은 어느덧 기술의 형용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서양에는 '과학적 기술'이라는 용어 또는 개념 자체가 없다. 구글에 'scientific technology'를 입력하면 알아서 'science and technology'에 관한 정보를 쏟아낸다.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Gasset)는 기술의 발전을 세 단계로 나눈다. 뾰족한 돌을 주워 동물의 가죽을 벗기던 '임의 기술'에서 유용한 기술을 갈고닦는 '장인 기술' 단계를 거쳐 17세기 과학 혁명을 맞으며 '현대적 기술'로 도약했다는 것이다. 과학이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처럼 과학을 기술의 시녀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일찍이 파스퇴르는 "응용과학이란 없다. 과학의 응용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 바 있다. 과학은 기술로 응용되어야만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종속 학문이 아니다. 흔히 인문학은 질문하는 학문이고 기술 혹은 공학은 답을 찾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과학도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차라리 인문학이다. 시인에게 시의 효용성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라면 과학자에게도 더 이상 그의 연구가 어떻게 경제 발전에 기여할지 묻지 마라. 과학을 응용의 굴레에서 풀어줘야 우리도 드디어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선도자(First mover)'로 탈바꿈할 수 있다. 기술로부터 과학의 독립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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