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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36] 말괄량이 벌 길들이기

바람아님 2017. 9. 15. 10:21
조선일보 2017.09.12. 03:1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시인의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마지막 구절이다. 우리는 대개 따뜻한 봄날 꽃가루를 나르느라 분주하게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에게 눈길을 주는데 시인은 왜 하필 능금이 익는 이 무렵에 꿀벌이 눈에 들었을까? 능금의 과즙을 빨아 먹느라 잉잉거리는 꿀벌은 나무에는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꿀벌은 미국의 경우 농작물 수분(受粉)의 80%를 책임지고 있어 그 생태계 서비스 효과가 연간 17조원에 달한다. 그런데 사실 벌이 꽃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꽃꿀과 꽃가루를 얻기 위함이지 식물의 번식을 도우려는 것은 아니다. 꿀을 얻기 위해 꽃 속을 누비느라 온통 꽃가루로 뒤범벅된 벌은 다리로 온몸을 쓰다듬으며 꽃가루를 모은다. 얼마나 꼼꼼히 긁어모으는지 실제로 다음 꽃으로 전달되는 꽃가루는 전체의 4%밖에 되지 않는다. 이 4%에 우리가 심어 놓은 거의 모든 농작물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적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최근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식물이 벌의 몸에 붙여준 꽃가루 중에서 머리 꼭대기, 등 한복판, 그리고 배 안쪽 깊숙한 곳에 들러붙은 꽃가루만이 벌의 갈퀴질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벌이 꽃 속을 드나들 때 식물의 암술이 닿는 부위가 바로 벌의 머리와 등판이다. 제비꽃처럼 벌이 매달리면 앞으로 축 처지는 꽃들의 경우에는 벌이 꿀을 빠는 동안 암술이 벌의 배 안쪽 한가운데를 방아 찧듯 연방 다독인다. 식물과 그들의 수분 매개체인 곤충은 이처럼 세심한 부분까지 서로 조율하며 공진화(共進化)했다. 하지만 이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식물이 곤충과 세밀하게 서로를 조율한 게 아니라 오매불망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말괄량이 벌을 길들여 근근간간 함께 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서도 이 지구 생태계를 뒤덮은 식물의 위대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꿀을 따고 있는 꿀벌들 모습. /조선일보 DB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