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은미희의동행] 하동 가는 길

바람아님 2017. 9. 27. 08:29
세계일보 2017.09.26. 21:02

‘……그래, 코앞의 바다 앞에서 솔바람 소리도 듣고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 하동으로 갈 거야.……’


한 시인이 최근에 내놓은 시집 가운데 ‘하동’의 일부이다.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이라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꽃과 함께 종점을 향해 가는 그 길이 곧 우리의 인생길 같지 않은가. 삶을 가장 순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죽음 직전일 터. 그러니 가장 죽기 좋은 곳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로도 들린다.


나는 하동 가는 그 길을 안다. 웅숭깊은 초록의 세상. 아니 그 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그 길 위를 오가는 길손을 맞고 그들의 여정을 위로할 것이다.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그 길. 그 길은 일상에 지친 나에게는 위로의 길이자 위안의 길이기도 하다.


며칠 전 그 길을 만났다. 가로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 길은 연신 나에게서 감탄사를 이끌어냈다. 처음 가는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길은 매번 처음 가는 길처럼 나를 설레게 만들었고 시선을 붙잡았다. 하긴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이 다르니 어찌 처음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흘러가는 강의 유속도 다르고, 그 강이 품고 있는 하늘빛도 다르고, 그 강에 허리까지 담근 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도 다르니, 나는 그 길을 그날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만 지루하고도 질리게 펼쳐져 있는 이국의 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무엇이 그 길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까. 드문드문 피어 있는 코스모스 하나도 충분히 이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길 위에서 목도했다. 어디 코스모스뿐일까. 초록의 세상에 불현듯 붉은색으로 도드라져 있는 백일홍, 칸나도 그렇고, 졸듯 무심한 얼굴로 지나쳐가는 금계화도 그렇고, 그것들은 모두 초록과 함께 있어 더 아름답고 더 애틋했다.


군락으로 피어 있으면 무리진 그대로, 아니면 저 혼자 바람에 날려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으면 그런 헛헛함대로, 모든 것이 주변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여도 풍요로웠고 무리지어 있어도 풍요로웠다. 함께 있음으로써 그것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고 있었다. 그 길의 아름다움은 조화에 있었다.


한데 그 길을 가면서 문득 나를 생각했다. 나도 주변의 것들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가. 욕심 사납게 나를 주장하고 나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그 길이 속삭인다. 함께 있어야 가장 아름답다고. 나도 하나의 풍경으로 스며들어야겠다. 그 풍경이 하동 가는 길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은미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