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0.03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68] 유치환 '보병과 더불어'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9월 21일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면서 한국은 어려울 때 유엔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에 신속한 파병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켜 준 16국에 대한 감사는 표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이 당연하고도 손쉬운 언급을 실수로 빠뜨렸을까?
나에게는 문 대통령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마치 비난을 받더라도 원치 않는 말은 안 하겠다는 듯 상기되고
경직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문학도의 지나친 민감성이었을까? 그리고 이어서 한국이 신속히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조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랑으로 넘어갔다. 특정 의제를 논하는 회의였더라도 우리 국가원수가 유엔에서 발언을 할 때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준 우방에 대한 감사로 서두를 여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세계의 국가원수들이 평화 공존 의지를
표명하는 의식적인 자리에서 참전국에 대한 인사를 누락한 것은 그 나라들과의 유대를 손상하는, 몹시 현명하지 못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어느 국제 행사에서 아버지가 한국전에서 전사해서 어머니가 자기들 4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내 동갑의
미국 여성을 만났을 때 참으로 죄스러웠다. 터키에 갔을 때 한 전통시장의 상인이 자기가 한국전에 참전했다면서 자기는
차범근의 열성팬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차범근을 있게 해준 사람인 듯이 고마웠다. 끊임없이 행해지는 무자비한 숙
청 이야기, 기근과 폭압과 착취로 유전자까지 변형되어 강인한 백성이 열등 민족으로 추락할 지경에 이른 생지옥 북한의
실상을 듣고도 우리나라를 지켜준 우방들에 감사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을까?
한국전 당시 피란민의 정경을 유치환은 이렇게 읊었다.
'차거이 빛나는 동지(冬至)의 창망한 바닷물이 다달은 거리/
그 거리의 한복판 대로 위에/ 쓰레기같이 엉겨든 사람의 이 구름을 보라/
저마다 손에 손에/ 일찌기 제가 아끼고 간직하고 입고 쓰던 세간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능히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라면 여편네의 속속것도/
자랑도 염치도 애착도 깡그리 들고 나와 파나니….'('배수의 거리에서')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우리를 그 폐허에서 비상(飛上)하게 해준 우방의 참전 용사와 그 후손이 우리의 번영을
늘 기뻐하게끔 마음을 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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