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7.11.14. 01:49
'지식국가' 경쟁력 버리는 망국행위
이제 국가가 일자리 만들어줘야
국책연구소 정원을 2배 늘리거나
교수 정년 단축·임금피크제 필요
1980년대 말까지는 이런 등식이 그런대로 유효했다. 논 팔고 소 팔아 대학을 보냈고, 유학도 서슴지 않았다. 박사들은 결혼시장에서 항상 1, 2위를 다퉜다. 1등은 예나 지금이나 판검사, 의사, 그다음이 박사였다. 교수직과 연구직이 보장되어 있었다. 베이비부머 막내 세대가 대입 학령에 도달한 1980년대 초반, 입학 정원을 두 배로 늘려 공급과잉 사태를 해결했다. 석사학위자들이 교수가 되는 예기치 않은 행운을 누렸다. 교수의 증가율은 대학진학률과 동시에 급상승했다. 민간 대기업 역시 몸집을 급격히 불렸던 시기였으므로 교육 투자의 리스크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교수 시장은 곧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임용이 정년 보장을 뜻하는 교수직의 불문율이 지성 인력의 신진대사를 차단했다. 퇴임 교수의 빈자리를 채우는 경우를 제외하곤 교수 공채는 하향세로 바뀌었다. 90년대 중반, 연구 능력과 교육 특성화 경쟁에 나선 대학의 긴박한 재정 형편이 교수 수급의 동결을 초래했다. 그나마 국책연구소와 민간연구소가 박사 인력을 흡수했는데 문과 계통의 박사들은 갈 곳이 마땅찮아졌다. 한사와 낭인이 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현실은 급변해도 문화적 유전자는 느릿하게 반응한다. 대학진학률은 75%,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을 경신했고, 미국 유학생도 중국과 수위 다툼을 할 정도로 교육투자열은 식을 줄 모른다.
올해 신임 대학 교수 평균 연령은 43.6세, 박사 실업자들이 학문을 접고 다른 생업에 뛰어들기도 늦은 나이다. 학문후속세대를 이 절망감에서 건져 내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의 선결 요건이다. 교육, 연구기관들이 신진 인력 공채를 거의 동결한 오늘날 고급인력은 거리를 헤맬 뿐이다.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해 보자.
첫째, 국책연구소의 정원을 늘리는 방안. 전국 51개 국책연구소는 석·박사 약 1만여 명을 고용하는데, 인문사회계와 이공계 연구소에서 각각 1000명씩 총 2000명을 더 채용하는 것은 즉각 실행 가능하다. 이와 동시에 한국연구재단의 ‘BK21사업’을 두 배로 확대하는 방안이다. 기존 BK사업단을 배제하고 신생 사업단을 편성한다는 교육부 방침에 의해 그나마 목매 온 생계 수단을 잃은 박사들이 양산될 전망이다. 둘 합쳐 추가 예산은 3000억원 정도. 박사가 되기까지는 민간 가계가 부담했다면, 고급지식 생산에는 국가가 책임질 충분한 이유가 있다.
둘째, 전국 330개 대학과 교수가 대책에 나서야 한다. 62세 정년 단축이나 60세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일이다. 교수 10만 명 중 62세 이상 원로급 교수는 1만 명 정도. 5년 임금피크제로 원로 교수 1인당 신진 교수 2명을 고용한다고 치면 총 2만 명, 일 년에 4000명 정도를 구제한다. 격렬한 논쟁이 일겠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지났다.
박사 낭인들의 열정이 시드는 모습을 보기 안쓰럽다. 그 아까운 젊음이 함몰되는 것을 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급인력의 방치는 ‘지식국가’ 한국의 미래 경쟁력을 버리는 망국행위고, 학문을 접도록 버려두면 매국행위다. 가가호호 서민 투자로 지식국가를 일궜다면, 이제는 국가와 대학이 합심해 안정적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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