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가정보원 예산도 총액만 공개된다. 국정원법에 따라 국정원은 기획재정부에 예산을 요구할 때 총액만 밝히고, 산출 내역은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어디에 얼마를 쓸지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없다. 감독 기관인 국회 정보위원회의 예산·결산 심의는 형식적이다. 그마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된다.
더구나 국정원 예산은 지출 증빙이 필요 없는 특수활동비로 분류돼 있다. 특수활동비는 기밀 유지가 필요한 정보·수사나 이에 준하는 국정 수행 활동에 쓰도록 돼 있는 돈이다. 법무부(검찰)·경찰청 등 수사기관이나 국방부, 청와대 등 정부 부처와 국회에도 일부 책정되지만 예산 전체가 특수활동비로 지정돼 있는 곳은 국정원뿐이다. ‘국정원 예산 중 미리 기획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비밀활동비는 총액으로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 있다’는 국정원법 12조 3항에 따라 다른 부처에 예비비나 특수활동비 명목으로 끼워넣은 예산도 수천억원에 달한다. 한 해 1조원에 육박하는 국정원 자금이 ‘묻지마 예산’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의 역대 국정원장 3명 전원이 특수활동비 탓에 사법처리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남재준·이병기 전 원장은 구속됐고, 구속을 면한 이병호 전 원장도 최소한 불구속 기소를 피하기 힘들다. 세 사람은 재임 중 월 5000만~1억원씩 총 40억원가량의 특수활동비를 박 전 대통령에게 제공해 국고에 손실을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직원을 시켜 5만원권 현금 다발이 든 ‘007가방’을 청와대 인근에서 ‘문고리 3인방’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들은 민간인 댓글부대 운영과 극우 보수단체 지원 활동에도 특수활동비를 사용한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정부의 국정원 비리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는 ‘정치 보복’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국정원장이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현찰을 대통령에게 매달 꼬박꼬박 바쳤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중범죄고, 엄벌 대상이다.
‘적폐청산’의 기치 아래 국정원 개혁 작업이 한창이다. 국정원 개혁 시도는 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용두사미로 끝났다. 국정원을 권력의 사설기관으로 여기는 대통령의 인식과 정권의 친위대장을 자임하는 국정원장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측근을 수장으로 앉히는 관행이 되풀이되는 한 국정원의 파행과 일탈은 근절될 수 없다. 국정원장이 국가안보보다 정권 안보를 중시하고,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을 애국으로 착각하는 한 국정원 개혁은 공염불이다. 이번에도 못 바꾸면 국정원은 문을 닫는다는 각오로 개혁에 임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본연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는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통할하는 ‘정보 수장’은 국가정보국장(DNI)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아무 인연이 없는 제임스 클래퍼 전 국방부 정보차관을 DNI로 임명하면서 “클래퍼는 귀에 거슬려도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발탁 이유를 밝혔다. 클래퍼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6년반 동안 DNI로 활동하며 최상의 정보와 분석으로 대통령을 보좌했다. 정보 예산과 관련한 뒷말도 전혀 없었다. 문 대통령과 서훈 국정원장은 두 사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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