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6.28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내게는 중학교 시절부터 한데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까까머리 중학생들처럼 키득거리며 논다. 우리 중에는 길눈이 유난히 어두운 두 친구가 있다. 그 옛날 광화문 지하도에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던 친구의 얘기는 거의 4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가장 쫄깃쫄깃한 안줏감이다. 기껏해야 구멍이 넷밖에 없는 지하도이건만 세종문화회관 쪽에서 들어가며 당시 국제극장이 있던 광화문빌딩 쪽으로 나가라고 하면 번번이 광화문우체국 쪽으로 나가곤 했다.
우리가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예전에는 방향감각이 엄청나게 중요한 속성이었다. 최근 노르웨이과학기술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방향감각은 상당 부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새끼 쥐들에게 소형 센서를 달아주고 처음으로 둥지를 떠나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때 그들의 뇌세포 활동을 측정했다.
아마 인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쥐의 뇌에는 방향감각을 담당하는 세 종류의 세포가 있다. '방향세포' '위치세포' '격자세포'가 그들인데, 이 중에서 방향세포는 갓 태어난 새끼 쥐의 뇌에도 거의 완벽하게 성숙한 상태로 발견된다. 타고난다는 얘기이다. 그런 다음 새끼 쥐가 눈을 뜰 무렵인 생후 15일경부터 그들의 청소년기가 시작되는 30일경까지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해마(hippocampus)에 있는 위치세포와 자신의 상대적인 위치와 이동 거리를 측정해주는 격자세포가 차례로 발달한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당연히 알아야 하지만 자신의 위치와 그의 상대적인 좌표를 파악해야 비로소 이동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방향감각 세포들의 성장 과정에서 암수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대체로 남성들보다 길눈이 어두운 것에는 유전보다는 오히려 학습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운전의 경우에는 이제 남녀 또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가 아니라 내비게이터의 유무가 길눈을 가늠한다. 한때 '거리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나였지만 요즘엔 내비게이터를 장만하지 못한 죄로 졸지에 친구들 중 길눈이 가장 어두운 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월드컵도 끝났겠다, 이제 다시 삶의 길을 찾아야 할 텐데 내 방향세포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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